Redondela까지 18km, 내가 산티아고에 온 이유는?
삭막한 항구도시인 Vigo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은 Redondela로 이동한다.
역대급 짧은 거리
오늘은 내가 산타이고에 온 이유에 대해 더 고민해 보면서 걷고자 한다.
순례길에 발을 들이고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지만, 대부분 1차원적인 고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포르투로 기차를 타고 갈까?, 우버를 부를까?
이런 고민을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당장 몸과 정신이 탈탈 털리다 보니 근본적인 고민은 뒷전으로 미뤄진다.
내가 산티아고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있어 보여서
두 번째, 멋져 보여서
세 번째, 마치고 나면 뭐가 돼있을 거 같아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다소 투박하고 단순한데 비해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과 조금이나마 달라 보이고 특별하게 보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사람과 다른 선택을 하는 걸 드러내고 뽐내야 한다.
그걸 위해 산티아고에 왔다.
하지만 막상 산티아고에 와보니, 깨달은 게 두 개 있다.
1. 내가 특별한 거 없는 사람이라는 것
2.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게 가장 행복하는 것
1.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아가 생기고부터 "난 좀 달라"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선택을 해왔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 3일 만에 그저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단박에 깨달았다.
그래서 굳이 멋져 보이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맞기를 바라며 최선의 노력한다.
2. 1번과 맞물려 평범한 일상은 지루하고, 깨트려야 할 대상이라 생각했다.
남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하자고 하거나 외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자는 얘길 하곤 했다.
이걸로 큰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서로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긴 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배워 삶이 조금은 특별하고 풍부해지길 바랐던 거 같다.
노말 하게 보내는 일상은 재미없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이 길에서 깨달았다.
지금 나에게 행복의 우선순위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퇴근 후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그리고 다음날 출근해야 할 직장정도이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은 앞으로 내 인생을 지탱해 주는 초석이 될 거라 의심치 않는다.
체득한 건 쉽게 잊지 못하니까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하나 하나 꺼내 정리하며 18km를 걸었다.
멋진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사진 찍느라 생각의 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번 화에는 사진이 많이 없다.
그래도 맛있는 저녁 사진은 필수겠지?
저녁 식사 후 무거운 등산화를 벗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걷고, 먹고, 빨래하고, 마을 구경을 하는 삶이 점점 일상이 되어간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내 고집스러운 생각들, 마음, 그리고 정신도 차츰 정리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