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찾아서
의도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굳이 떠났었구나. 데이트 10번을 하면 8번은 회를 먹을 만큼 회를 사랑하는 우리는 “강원도 가서 회 먹을까?”라는 한마디에 속전속결로 강릉 여행을 계획하였다. 주말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내달리며 왠지 모를 통쾌함과 함께 땅 끝으로 향했다. 회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여행지 특유의 기분 좋은 낯섦은 회 못지않는 최고의 안주가 되었고 맛의 차이는 잘 몰라도 강릉에 왔으니 굳이 동해소주를 시켜준다.
원래는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다음 날 고성의 유명한 막국수를 먹어야 한다며 굳이 하루를 더 있기로 했다. 즉흥적인 걸 극혐 하는 계획주의자인 나에게도 이런 즉흥은 찬란하게 반가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해는 먹구름에 숨어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주지 않는 짓궂은 날씨였지만 비 오는 강릉 바다를 언제 보겠냐며 그조차도 낭만 있게 느껴지는 콩깍지가 아주 단단하게 쓰였었다.
사실 2일 차에는 전 날 과음과 외박으로 인한 피로로 체력이 다 해 많은 걸 하지는 못했다. 오션뷰 카페에 들러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비 오는 바다를 걷고,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걸 샀다. 그러고 임시 보금자리로 돌아와 배달 음식과 함께 정주행하고 있던 드라마를 몰아보았다. 이때 먹었던 김치찜의 짜릿한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회 먹으러 떠나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배달 김치찜이라니. 이것도 낭만인가. 암무튼 행복했던 굳이데이를 즐기고 왔다.
최근 낭만이 화두가 되며 여기저기서 낭만 타령을 하다 굳이데이까지 나오게 되었다. 사실 굳이데이라는 건 어딘가로 떠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의 좋은 핑곗거리가 아닐까. 그냥 떠나기에는 현실에 불안하고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기에(우리 민족의 디폴트는 잠은 적게, 최대한 열심히,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이기에..) 굳이데이라는 좋은 포장지로 자신의 일탈과 자유를 멋지고 화려하게 감싸고 싶었던 것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조어는 그 시대와 사회의 위치와 고민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굳이데이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굳이데이가 아니면 회를 먹으러 강릉을 가고 싶어도, 김밥을 먹으러 한강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굳이 이런 핑계를 대야만 여유를 찾으러 떠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굳이데이와의 첫 만남은 색다르고 반가웠지만 이후엔 쓸쓸함이 몰려왔다. 앞으로는 우리 사회가 핑계 없이 개개인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내가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