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선 달아났고 자연에선 기뻤다

스타필드와 태기산

by 찌니

스타필드 별마당도서괸

지난 1월 26일 오픈했다는 수원 '스타필드'에 간 건 오로지 '별마당 도서관'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곳을 하필 설 명절 전날 갔다. 인파로 미어터지더라는 아들의 말도 있었지만 명절 전날 오후니까 많은 사람들이 귀향길로 여행길로 분산되어 조금은 여유롭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출발했다. 우리의 기대는 빗나갔다. 진입부터 엉금엉금 기어가야 했고 주차를 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별마당 도서관은 3층부터 7층이라는 사전 정보에 따라 위에서부터 내려오기로 하고 일단 7층으로 올라갔다. 과연 거대하고 웅장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빼내는 높은 서가는 영상으로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거대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벌어진 입이 한동안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름 그대로 형형색색의 도서(진짜 책인지는 모르지만)가 높고 넓게 밤하늘 별처럼 빼곡히 장식되어 있었다. 도서관 특유의 고풍스럽고 아카데믹한 건축물이기 보다 현란하게 장식한 테크니컬의 진수를 보여주는 건축물 같았다. 그나마 거대 건축물을 앉아서 관망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나 빈자리는 단 한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빼곡하게 진열된 장식용 도서 외에 바로 빼서 펼쳐 볼 수 있는 도서들도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고 얘기를 하고 폰을 들여다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진득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방문한 그날 그 별마당도서관은 그냥 웅장한 건축물, 너무 거대하고 웅장해서 오히려 위축감을 주는 건축물일 뿐이었다. 그 거대한 웅장함과 수많은 인파로 인해 우리는 4층 쯤에서 달아나듯이 그곳을 나왔다.

" 다음엔 평일에 친구하고 와... 시간 보내긴 좋겠네..." 그만 가자고 먼저 제안한 것이 미안한 듯 남편이 그렇게 말했지만 글쎄... 내 의지로 다시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 설날에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태기산(1,261m)'에 가볼까 임의로 결정해 놓고 등산을 싫어하는 아들을 꼬셨다.

산 밑까지 차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는 시간은 고작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실제로는 한 시간 정도), 그리고 아빠는 태기산에 갔다 온 다음날에도 등산 계획이 있기 때문에 올라올 때는 꼭 네가 운전을 해줘야 한다....나는 아직 운진에 미숙하고... 아빠도 운전하는 게 예전 같지가 않더라... 걸핏하면 아, 잘못 들어왔네... 앗 저기로 가야 하는데... 하더라...


이 든 부모에 대한 동정심 유발 작전, 그리고 네가 꼭 필요하다는 임무 부여 작전은 성공했다.

날씨가 춥지도 않고 눈 비 예고도 없는데 남편은 등산 장비를 챙기는 데 유난히 열심이었다. 아들의 동행이 남편은 마냥 좋은 것이었다. 등산화가 따로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 등산양말과 아이젠과 넥워머와 휴대용 의자까지 아들 몫으로 따로 손수 챙겼다. 눈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겨울 산행은 무조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장비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면 나는 먹거리 챙기기에 바빴다. 남편은 수시로 폰에 들어가 날씨를 점검하면서 산의 정상은 바람이 거셀 것이고 기온도 영하일 확률이 높을 것이니 간단하게 사발면만 준비해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들이 좋아하는 참치김밥을 가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바로 쌀 수 있도록 밤늦도록 주방에서 달가락거렸다.


아침 9시 조금 넘어 출발했다. 30분 정도 지체되었으니 그만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강원도가 가까워지면서 곳곳에 눈 쌓인 벌판이 펼쳐졌고 멀리 보이는 산은 히끗한 설산이었다. 자동차가 태기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는 구불구불한 도로 양 옆으로 희디흰 설경이 펼쳐졌다.

해발 980m에 위치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눈을 동반한 거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나뭇가지에 안착해 있다가 바람에 날려 온 눈인지 그 모두를 포함한 눈인지 알 수 없었다. 예상보다 험한 날씨가 아들의 눈치를 보게 했다. 역시나 아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아들과 나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의 표정은 좀 긴장되어 보였다. 아들의 운동화 위에 아이젠을 꼼꼼하게 채워 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무조건 유쾌하자고 작정했다.

사전 정보에 의하면 주차장에서 정상까지의 코스는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이며 완만하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아들은 못마땅하고 귀찮다는 듯 천천히 우리의 뒤를 따랐다. 양 옆으로 눈꽃을 피운 나무들이 장관이었다. 날씨는 잔뜩 흐려서 하늘과 허공과 산맥의 구별이 되지 않고 그저 뿌옇기만 했다. 유난히 크고 위압적인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뿌연 안개에 가려 언뜻언뜻 보이는 발전기의 거대한 기둥과 날개는 우주선이나 우주괴물처럼 기괴하게 보이기도 했다. 올라갈수록 상고대가 장관이었다.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백배커들이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배낭의 무게에 거의 꼬꾸라 질 듯 힘겨워 보여도 까무잡잡한 그들의 얼굴에선 평온한 희열이 느껴졌다. 눈 덮인 천 고지의 산 위에서 밤을 보내고 내려오는 것이리라. 한때 백배커를 꿈꿔 본 나의 눈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모습이었다.


바람은 거칠어졌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했고 눈발도 날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으나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올라갈수록 깊고 섬세해졌다. 이렇게 제대로 된 겨울 산행을 하는구나... 남편과 나는 매우 흡족해하면서 올라갔다. 가끔 멈춰 서서 뒤따라 오는 아들을 기다려 주었다. 아들은 온통 뿌연 눈 속에서 깊은 상념에라도 빠진 듯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가까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처음 걸어보는 눈 덮인 천 고지의 산을 오르면서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참 다행스럽게도 아들의 표정이 출발 때보다 좋아 보였다. 짜증스럽게 굳어 있던 표정이 풀리고 차가운 눈바람을 맞아 붉그레해진 얼굴에 언뜻언뜻 뜻밖의 수한 기쁨의 표정이 보였다. 아들로서는 서른 해 생애 처음 보는 풍경이고 체험인 것이다. 마냥 힘들고 짜증만 날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이상한 희열이 느껴지는, 그러나 지금까지 싫어라 한 전적이 있으니 그 희열을 표현하기는 좀 쑥스러운 그런 표정이라고나 할까...


애 표정이 출발할 때보다 많이 좋아 보여... 나의 이 말에 남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헤벌쭉해졌다. 아들에게는 30분이라 했지만 실제는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고 우리는 한 시간 30분 만에 눈 속에 우뚝 서 있는 표지석 앞에 도착했다. 아들을 꼬시면서 말한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초과했지만 아들은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자 하면 피하기만 하던 아들이 표지석 앞에 우뚝 섰다. 우리는 아들의 멋진 사진을 그제야 찍을 수 있었다. 표지석 앞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어른 크기의 눈사람이 있었다. 아들은 눈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산길에는 등산로에서 비껴 난 태기분교가 있던 넓고 평평한 공터에 들어가 김밥과 사발면을 먹었다. 김밥은 식었고 뜨거운 사발면도 금방 식었지만 눈 속의 만찬으로는 최고였다.

거의 세 시간 반 만에 다시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이젠을 벗고 차에 타고 나서야 아들은 발이 너무 시리다고 젖은 양말을 벗었다. 그럼에도 아들은 단 한마디의 불만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언 발을 감싸라고 무릎담요를 펼쳐 주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너도 이제 등산화를 마련하라고 말했고 아들은 노, 라도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밝았다.

올라오는 길은 아들이 운전했다. 운전하는 아들의 조수석에서 불안해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남편이 운전할 때보다 더 편안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남편도 나도 쏟아지는 졸음에 고개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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