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부터 시작된 글쓰기수업의 마지막 글이다.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또다시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시간으로 돌아갈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마지막 날답게 오늘의 주제는 '나는 내일도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다.
그동안 나는 에세이 9편과 단편소설(초고) 3편을 썼다. 에세이라 하기도 소설이라 하기도 사실은 너무 부끄럽지만. 단편소설 중 2편을 퇴고해서 한 번씩 더 올렸고 오늘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완성한다면 에세이는 10편이 된다.
처음 시작할 땐, 내가 이렇게 주말을 뺀 3주 15일 동안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써낼 줄(글의 수준을 떠나서) 몰랐다.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나는 하루 한 개씩 주어진 주제에 최대한 맞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하루 동안 쓰고 고치고 마무리를 해서 올리고 있었다. 딱 한번 퇴고글을 제외하고 밤 12시 마감도 다 지켰다.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 마감에 쫓기면서도 마감을 지켰던 그 습관이 남아 있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강사의 두 번의 피드백에서 어쩌면 나는' 좀 쓸 줄 아는' 편에 속하지 않을까(착각이 아니기를...), 그러므로 쓰는 일을 계속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조심스럽게 갖게 됐다.
특히 3편의 짧은 소설을 써냈다는 게 나는 무엇보다 뿌듯하고 기뻤다. 더구나 소설에 대한 강사의 칭찬은 너무 과분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물론 격려 차원의 칭찬이 칭찬의 절반 이상임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대가족이 사는 빈농의 가정은 책과 거리가 멀었다. 교과서 외에 유일하게 집에 굴러다니는 책은 당시 티브이에 만화로 방송되던 '들장미 소녀 캔디'와 '남이장군' 만화책이었다.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우리 집 사랑방에 들어와 굴러다녔는지 모른다. 교과서 외에 내가 접한 최초의 스토리가 있는 책이었다. 나는 그 만화책을 끼고 살았다. 특히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주제곡과 함께 눈물을 뿌리면서도 활짝 웃는 밝은 모습으로 들판을 뛰어다니는 '들장미 소녀 캔디'는 나에게 아름답고도 슬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캔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캔디와 캔디의 착한 친구 '앤'과 캔디를 괴롭히는 ' 이라이자' 그리고 늘 셔츠 깃을 세운 모습으로 나오는 긴 머리의 잘생기고 멋진 캔디의 사랑 '테리우스'의 그림까지 따라 그렸다. 특히 캔디는 양쪽에 리본으로 묶은 풍성한 웨이브 머리와 콧등의 주근깨와 커다랗게 반짝이는 눈과 함박 웃는 커다란 입까지 거의 똑같이 그릴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기 시작했고 나중엔 순서를 정해 그려줘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당시 학년초마다 작성하던 학생기초자료에는 빠지지 않고 '장래희망' 란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만화가'라고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만화가나 소설가'라고 써넣었다. 제대로 된 소설책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때였는데 나는 '소설가 '라고 써넣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 막연한 꿈의 기원이었다.
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느 안개가 자욱한 날 나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방문객은 안개에 싸여 보일 듯 말 듯 흐릿했다. 그는 자신을 '소설가'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방문객이 반가우면서도 불길하여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 사이 방문객은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돌아서 가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방문객이 가끔 생각났다. 잊히지가 않았다. 그리워졌다. 그랬다. 나는 그 소설가라는 안개에 싸인 흐릿한 방문객을 짝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는 길고 긴 세월 동안 그 방문객은 잊히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정말 떠나가 버린 듯도 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또 가까이 와 있었다. 흐릿한 채로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내 삶이 보잘것없이 허접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는 그 방문객을 떠올렸다. 그는 가끔 나의 어지러운 꿈 속에 찾아와 내가 너의 진짜 꿈이라고 속삭였다. 버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살라고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그 방문객이 다시 찾아왔을 때 실망하여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를 잡아둘 수 있는 그의 두 친구 ' 독서와 습작'을 늘 곁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방문객이 다시 찾아오는 날, 나는 그때의 그 방문이 제대로 된 방문이었다고, 잘못 찾아온 방문이 아니었다는 고백을 꼭 듣고 싶어 졌다. 그때가 되면 그 방문객은 흐릿한 모호함을 벗어던지고 뚜렷한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아마 무언가를 쓰려고 애쓸 것 같다. 아니, 무언가를 쓰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