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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Aug 22. 2024

이사 그 후... 1

평화와 지겨움은 한 끗 차이

이사 온 후 17일이 지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삼복더위의 이사였다. 하루종일 에어컨과 써큘레이터를 켜놓고 있다가 이사로 인한 막대한 지출과 한 달 후 날아 들 청구서에 보태어질 전기세가 무서워 오후 늦게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고 어쩌다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오히려 끈적끈적한 습기와 열기를 품고 있어서 더욱 불쾌했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 그 바람의 감촉이 달라졌다. 나는 지금 그 달라진 바람을 맞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사 와서 가장 좋아하게 된 자리에 앉아서.


이 자리는 남편의 워크테이블이고 안방의 창쪽  구석에 놓여 있고, 사실은 전 집에서 쓰던 4인용 식탁이었다. 새 식탁을 구매한 터라 필요 없게 되었지만 오로지 남편의 뜻에 따라 가지고 온 물건이다.  남편은 거실의 소파 옆 창쪽 구석에 놓고 티테이블이나 워크테이블로 쓸 거라고 했다. 나는 비어 있는 공간을 좋아하고 남편은 비어 있는 공간은 채우고 보는 성격임을 이번 이사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집안 인테리어에 별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몇 번 의견을 제시했다가 반대에 부딪치면 그냥 거둬들이는 편이었다.


이 식탁을 안방에 들이자는 것은 동생의 의견이었다. 동생은 이삿날과 그다음 날까지 남아 다이소를 이마트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모로 살림에 부실한 나의 새 집 정착에 필요한 세세한 것들을 도와주었다.

이사 다음 날 남편이 출근한 틈을 타 동생은 거슬리는 식탁을 안방에 들여놔 보자고 했다. 그래, 뭐, 처제가 그렇게 해 놨다고 하면 화는 못 내겠지... 하고 동조했다. 식탁에 테이블보를 덮고 급하게 쿠팡에 책상매트를 구매해 깔고 사진액자와 달력을 놓고 노트북을 놓고 의자를 끌어다 놓았더니 그럴듯한 워크테이블이 되었다. 처음엔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남편도 한 번 앉아서 일을 해 보고는 흡족해졌는지 재택근무 때마다 잘 이용하고 있다.


안방과 마주한 내 방엔 아들이 쓰던 책상을 놓았다. 내 방은 안방보다 작고 전 집에서 쓰던 황토카우치와 붙박이장까지 들여놔서 더욱 좁아졌는데 나는 그 좁은 공간이 주는 아늑함이 좋았다.

며칠 전 혼자 남은 오후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어 놓은 후 안방의 남편 워크테이블에 앉아 보았다. 오른쪽 창문 너머는 원목 데크타일을 깔아 놓은 넓은 베란다이고 베란다의 통창에 가까운 창문 너머는 주로 4층이나 5층으로 된 오래된 빌라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하늘을 찌르며 들어선 신축의 고층 아파트들과 하늘이 보였다. 베란다 창문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은 일단 베란다 천장 건조대의 옷걸이에 걸린 빨래들을 흔든 후  안방의 워크테이블을 지나 거실과 연결된 복도를 지나 세로로 긴 내 방을 지나 내 방 창문으로 나갔다. 제법 선선해진 저녁바람이 좋아서 나는 내 방 책상 위에 책이 펼쳐진 독서대를 가지고 왔었다. 그 자리에서 어둠이 올 때까지 오래 앉아 있었다. 책을 읽기보다 바람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바람을 참 좋아하니까. 어쩐지 이번에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널어놓은 빨래에  자꾸 눈길이 갔다. 건조대에 널어 말릴 필요가 없는 건조기의 등장으로 점점 사라져 갈 풍경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번 이사 때 건조기 구입을 고려하다가 미뤄둔 터이기도 하니까.


전 집에도 안방의 창 너머에 베란다가 있고 천징 건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안방은 따로 테이블을 들여늫을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았고 베란디 또한 협소했다. 그래서 빨래가 널렸을 때는 구석에 놓인 세탁기에 가기 위해서 몸을 구부려야  했고 가벼운 이불빨래라도 널려 있으면 들어갈 공긴조차 없었었다. 그렇더라도 비람  부는 날에는 건조대의 빨래가 흔들리기도 했을 터인데 그곳에 사는 10 여년 동안은 이런 시간을 가진 기억이 없다. 어쩌면 그곳에서도 이사간  처음 얼마 동안은 빼곡한 삘래 사이에서 바람을 칮아 음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에서는 시라졌지만.


오늘 나는 책 대신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앉았다. 모니터의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만 보고 있으니 바람이 자꾸 머리를 날렸다. 나는 머리를 귀뒤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천장 건조대의 옷걸이에 걸린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두 뼘쯤 내려진 블라인드의 귀퉁이가 바람에 흔들리며 창문 귀퉁이를 탁탁 쳐댔다. 그 너머 붉은 벽돌색의 빌라 옥상에서 자라는 크고 작은 녹보수 무성한 잎들도 바람을 타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나는 고개만 돌리고 있다가 아예 의자를 돌리고 창문턱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정면으로 앉았다.  작정하고 맞이하려 하니 오히려 바람이 잠잠해졌다. 그 사이 아직 미미한 열기를 품은 공기가 덮쳐 왔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다. 금방 바람이 불어올 것이므로.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바람을 기다렸다. 미미한 열기가 얼굴에 닿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왔다. 열기가 씩씩대며 바람에 날아가는 듯했다. 눈을 떴다. 천장 건조대의 옷걸이에 걸린 남편의 티셔츠가 어깨를 흔들며 추는 춤사위처럼 흔들리고 아들의 트렁크팬티가 엉덩이를 흔들며 추는 춤사위처럼 흔들렸다.  거기에 장단을 맞추듯 블라인드가 탁탁 창문귀퉁이를 쳐대며 흔들리고 창문 밖 빌라의 옥상 위 녹보수 싱싱한 나뭇잎들이 이 쪽 춤사위에 덩달아 신이 난 구경꾼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 평화롭다...


저절로 눈이 감기며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 평화로운 저녁이구나...


더 이상의 욕심 없이 이렇게만 살다가... 이렇게만 살다가 죽어도 괜찮겠다... 이 의자에 이렇게 앉아 바람을 음미하다가 언젠가 삶을 다한 나의 육신도  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사라졌으면... 욕심 없이... 욕망 없이...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드르르르...


극으로 치닫는 나의 상념을 깨운 건 핸드폰의 요란한 진동음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남편이었다.

뭐 하느라 톡을 안 봐?

왜? 저녁약속 있다고 안 그랬어?

취소 됐어... 들어간다고...

저녁은?

안먹었지

알았어...


나는 창문턱에서 두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에효.... 이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엉덩이에 달라붙은 옷을 손으로 뜯어내며 어기직 어기적  주방으로 향했다.


평화는 무슨....죽어서야 벗어날 끼니의 반복...지겹다...지겨워...


나는 외로움에 지친 늙은이처럼  중얼거렀다.


그러니까  평화와 지겨움은 겨우 이렇게  한 끗 치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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