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보다 늦게 출발하여 오전 11시가 넘은 시간에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865에 위치한 해발 1,330m 만항재에 도착했다. 두꺼운 솜이불처럼 눈이 쌓여 있지는 않았지만 얇은 솜이불에 덮혀 있는 듯한 날이었다. 천 고지 설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은 영하 10도에 가까운 추위 속에 짧고 허무하게 오그라들었다. 배낭을 메고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등산 안내도를 올려다보며 둘레길만 돌고 가면 안 될까? 말해 보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정상은 밟아 봐야지... 했다. 내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자 한 시간 반 정도만 올라가면 된다고도 덧붙였다. 무릎이 아파서 6개월 정도 산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지 알고도 강행하는 건지 잠깐 섭섭한 마음이 지나갔다.
까짓 올라가다가 힘들면 도로 내려오면 되는 거지 뭐... 그런 생각으로 출발했다. 주차된 차에 비해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등산을 시작하기엔 늦은 시간이어서 남편은 서두르는 듯 했다. 등산로 입구라는 팻말을 향해 몇 걸음을 가다가 남편은 뭔가 잊어버린 듯 다시 차로 향했다. 차의 뒷좌석에 있던 무릎담요를 꺼내 배낭에 쑤셔 넣었다. 그걸 뭣하러 가져가 이 추위에 얼마나 앉아 있겠다고... 한마디 했지만 묵묵부답.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몇 해 전 북한산에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 떨어진 경험 이후로 더욱 겁이 많아진 나와 지난주 무슨 정맥인가를 종주한 남편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아이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해 보았지만 괜찮으니 좀 더 올라와 보라고 했다. 길이 좁고 가팔라서 멈추어 서서 배낭을 내려 아이젠을 꺼낼 장소가 마땅치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 아이젠 해야겠다고 미끄러질 것 같다고 징징거리며 올라갔다. 오르막길의 끝에 남편이 멈춰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다가서자 남편은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냈다. 나도 아이젠을 꺼내 등산화에 채웠다. 조금 평평한 길이 시작되었다. 주차장에서 휘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져 있었다. 얼굴은 차갑고 몸은 난로를 품은 것처럼 적당히 후끈했다. 뜨겁고 차가운 한겨울 산행의 맛이었다.
앞서 가던 남편이 자꾸 돌아보았다. 내 등산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젠 거꾸로 끼운 거 같은데... 했다. 내려다보니 한쪽 아이젠이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다시 바로 하기 귀찮았다. 걷는데 별 지장도 없는 것 같았다.
괜찮은데 뭐 그냥 가...
다시 해...
괜찮다니까...
다시 해...
아이 참 괜찮다니까...
결국 다시 아이젠을 벗겨 바로 채웠다. 남편은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뒤쳐져 걸었다. 가끔 서서 주위를 휘 둘러보기도 하고 셀카를 찍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건드려 눈보라를 일으키기도 하면서 걸었다. 그 길엔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앞서 가는 남편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 속도대로 내 마음대로 가다 보면 어디 쯤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남편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 눈 팔지 않고 정상을 향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올라가는 스타일이다. 나는 풍경에 상념에 자주 사로잡혀 발걸음이 일정치가 않은 스타일이다. 특히 남편과 산행할 때면 속도를 내려고 풍경과 상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껏 늦장을 부리며 세월아 네월아 올라간다. 남편은 남편의 속도 대로 가고 나는 나의 속도 대로 간다.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혼자가 아닌 듯 혼자인, 따로 또 같이인 산행은 남편과의 산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이며 여유이며 기꺼운 쓸쓸함이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한 번도 좀 빨리 오라느니 하는 말이나 인상을 구기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번 등산은 풍경과 상념은 차치하고라도 유독 발걸음이 무거웠다. 겨울 들어 첫 등산이고 설산의 등산이고 또 무릎이 아프고 살이 쪘기 때문이다. 올겨울 들어 처음 꺼내 입어 본 겨울 등산바지가 너무 쪼여서 기모 타이즈 위에 헐렁한 회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선 등산이었다.
기다리고 서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며 나 많이 힘들어 보이지 않아? 나 너무 느리지? 힘드네 많이... 먼저 이실직고했더니 왜 그렇게 힘들어하냐고 물었다.
살쪄서 그렇잖아... 그리고 겨울 들어 첫 산행이고... 무릎도 예전 같지 않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야?
숨차게 뱉어내는 나의 말에도 남편은 대답 없이 잠시 함께 서 있어 주더니 돌아서 또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친구들과의 산행과 몇 번 참가했다가 그만둔 산악회 산행이 떠올랐다.
그 산행에서는 그들과 맞춰서 올랐다. 너무 앞장서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게 속도를 조절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를 배려하고 나는 그들을 배려하는 산행이었다.
남편은 나를 배려하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주지 않는다. 대신에 너무 멀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묵묵히 말없이 기다려준다.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산행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젠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방법이 되었다.
길고 완만한 길이 끝나면서 가파른 돌계단이 시작되었다. 그 계단의 끝에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뒤는 함백산의 정상이었다. 정상으로 올라서거나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준 채 남편은 비껴 서 있었다. 정상이 코앞인데 올라가지 않았다. 정상은 나와 함께 디디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서 나는 엄청 긍정적인 인간으로 바뀌고 있다. 근거 없는 긍정. 이제 그만 편안하게 살고 싶은 일종의 자기 최면인지도 모른다.
해발 1,572m의 함백산 정상엔 바람이 휘몰아쳤다. 겹겹이 포개어진 천 고지 백두대간의 산맥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소리는 웅장한 관현악단의 음악처럼 들렸다.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 없는 풍경은 지루하고 풍경 없는 사람은 비루하다... 사람과 풍경과의 관계를 이토록 잘 표현한 문장을 나는 모른다.
해서, 2026년 1월 함백산의 삭막한 겨울 풍경은 절대 지루하지 않았고 그 정상에서 헐렁한 트레이닝바지를 휘날리며 칼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는 절대 비루하지 않았다.
사발면을 먹기 위해 정상 밑 데크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이 무릎담요를 꺼내 주었다.
"나 오늘 엄청 느렸지? 저 아래서 느릿느릿 힘들게 올라오는 나 보고 뭐 느낀 거 없어?"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놓고 기다리는 동안 물어보았다. 대답 없이 몬스터크랩 벗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객관식으로 내 볼까? 일, 마누라 늙었구먼... 가엾어라... 이, 집에서 빈둥거리더니 살만 띠룩띠룩 쩠군...
이, 번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은 이,라고 크게 대답했다.
대답해 놓고는 무안했는지 우하하하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의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말없이 자석처럼 붙어 앉아 있던 젊은 연인이 힐끗 쳐다보았다.
뜨끈하고 얼큰한 신라면 사발면은 너무 맛있었다. 너무 맛있는데 너무 양이 작아서 조금 아쉬웠다.
사발면을 먹고 믹스 커피도 타서 마시고 나자 엉덩이가 얼얼하고 손끝이 시렸다. 하산길을 서둘렀다.
하산길은 남편의 뒷모습이 보이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함백산 # 함백산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