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도 배고픔도 잊게 한 양평의 기산음악박물관 탐방기

by 찌니


인연

지난해 4월 안양에서 동문 권 ㅇㅇ 님의 첫 시집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평론을 써주신 박교수님(방송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도 오신다고, 우리 지역에서 하는 행사이니만큼 학우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방송통신대 안양시학습관 국어국문학과 3학년 대표인 김이 3학년 단톡에 글을 올렸다.

그 출판기념회에서 김은 박교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김과 친한 국어국문학과 40대 회장 이가 사교성 좋고 말발 좋은 김을 박교수 옆자리에 떠밀어 넣었다. 그렇게 나란히 앉게 된 김과 박교수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대화 중 박교수가 양평에서 기산 음악 박물관의 관장으로 있다고 학우들 데리고 한 번 오라고 초대했고 김은 기꺼이 한 번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김은 바로 스터디팀에 이 초대를 공유했다. 그러나 반응은 미지근했다. 가정과 공부와 일을 기본으로 병행하는 학우들은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교수가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겠냐는 회의를 품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중늙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직접 대화한 김은 교수님이 진심으로 말한 거라고, 간다고 약속 했기 때문에 가야 한다고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힐 만 하면 화제에 올렸다. 그런 김의 적극성과 집요함으로 그 약속은 해를 넘겨 지난 1월 6일에야 겨우 성사되었다. 여행하기 좋은 아름다운 계절을 모두 보내 버리고, 그것도 강추위가 예상되니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안전문자가 수시로 날아오는 한겨울 영하의 쩡한 날에 말이다.

인원

일행은 스터디 멤버인 나와 김과 최, 그리고 국문과 회장 이가 빠진 자리는 4학년 백선배가 채웠다. 백선배 역시 김이 섭외했다. 같은 학생회 임원으로 각종 행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몇 번인가 함께 차를 타고 다닌 관계라고 했다. 김이 운전하는 차로 안양에서 오전 10시 30분 무렵 출발했다. 한 겨울 평일의 오전 양평 가는 도로는 시원하게 뻥 뚫려 있었다.

조수석에는 백선배가 앉고 나와 최가 뒷자리에 앉았다. 도중에 운전하는 김의 폰으로 교수님 전화가 한두 번 왔다. 정확한 도착 시간을 알려 달라고 했고 주차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뭔가 대화가 살짝 어긋나는 듯이 들렸다. 교수님이 염려하는 점을 김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지난 학기 ‘문학비평론’ 의 방송강의로만 얼굴과 목소리를 익힌 교수님이었다. 그러니까 김 외에 세 명 에게는 첫 대면의 날이었다.교수님은 방송 강의 도중에 오래 전 제자들을 이끌고 해외로 문학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한참 해 주기도 하는 등 다른 길로 빠졌다가 되돌아 오기도 하고 중간 중간에 가요 팝 클래식 등 음악을 들려 주기도 했다.


미숙한 완벽주의자

납빛의 강물과 용문산에서 뻗어나온 듯한 산줄기가 펼쳐지는가 싶더니 저 멀리 낮은 건물들과 밭과 공터 속에 ‘기산음악박물관’ 이란 현판을 단 3층 건물이 보였다. 운전하는 김과 조수석의 백선배는 네비게이션과 도로를 번갈아 보면서 이쪽으로 저쪽으로 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박물관 건물을 멀리 돌았다. 텅빈 계곡 옆 좁은 길을 한참을 서행하며 두리번거리더니 저기로 가면 되겠다고 했다. 길은 기역 자로 꺾여 있었다. 어? 이 길 맞아? 내다보며 모두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한 마디씩 했다. 김의 투싼 중형차가 꺾어 들어가려는 그 길은 소형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 보였다. 아 이래서 교수님이 공용주차장으로 오라고 그랬구나... 김은 그제서야 교수님의 뜻을 이해했지만 돌아나갈 수 없는 외길이었다. 김이 망설이자 백선배가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양쪽에 팬스가 쳐져 있는 그 길로 겨우 들어가서 500m 쯤 서행하니 박물관 건물의 마당이 보였다. 담 역할을 하는 팬스가 쳐져 있는 마당에는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주차할 공간은 겨우 두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아 이래서 교수님이... 한번 더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자동차를 마당 안으로 들였다. 자동차는 무사히 마당에 들어왔다. 그러나 백선배가 이렇게 전면주차를 해 두면 나갈 때 애먹는다고 차를 돌려 주차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리고 김은 사이드미러와 후방 화면과 차창 밖을 번갈아 보며 핸들을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돌렸고 백선배는 차 가까이에서 앞으로 뒤로 다시 앞으로 뒤로 하면서 주차를 도왔다. 공간이 좁아서 자동차는 아주 조금씩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여유공간이 없는 좁은 공간에서 최소한 60도 이상을 돌려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당에서 주차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옆건물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교수님이 보였다.

이이고 참 이래서 내가 저기 공용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는데... 자 자 자 한 스무 번 전진 후진 해야 할 거니까... 천천히 천천히... 하면서 바로 마당으로 내려가 김과 자동차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앞으로 그만... 자 핸들 끝까지 꺾고 뒤로 뒤로... 조금 더 조금더... 스톱... 다시 앞으로 아니 아니 반대방향으로 꺾어야지... 좀 더 좀 더 스톱 다시 후진 후진 좀 더 좀 더... 스톱... 다시 앞으로... 검은색 패딩과 운동화를 신은 교수님은 노련한 운전학원 강사 같았다. 스무번 까지는 아니더라도 열 번은 넘게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서야 비로소 입구 방향으로 주차해 놓을 수 있었다.

그제야 첫인사를 나누며 대면했다. 그때쯤엔 이미 첫 대면의 어색함 따위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반쯤은 휘발되었다. 주차로 인한 뜻밖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교수님은 김을 미숙한 완벽주의자라고 바로 별명을 만들어 붙여 주었다. 교수님은 박물관 건물 앞쪽으로 들어오면 주차가 힘들 것이므로 공용주차장을 찍고 오라고 했고 김은 공용주차장을 찍으면 아무래도 박물관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을 염려해 이미 입력해 놓은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바꾸지 않았다.

미숙한 완벽주의자... 그 말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매사에 완벽하고자 애쓰고 노력하여 완벽한 듯 하지만 어딘가 조금은 미숙한... 김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인간다움. 과연 국문학과 교수님다운 즉흥적이면서 예리한 통찰이었다.


사진찍기도 유쾌하게

교수님은 우리를 건물의 뒤쪽으로 안내했다. 누렇게 바랜 잔디마당 아래에 텅 빈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을 내려다보며 모두 잠깐 어이없어 했다.

잔디 마당의 파라솔 테이블들은 접힌 채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텅빈 야외공연장의 무대 위엔 아는 가수의 이름과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이 덩그렇게 걸려 있었다.


이것이 900석 정도 되는 공연장이고 지난해 10월 콘서트를 했지... 3층은 카페 1층과 2층은 박물관이고... 옆에 2층 건물은 내가 반려견 두 마리와 기거하는 곳...


교수님의 박물관장으로서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에게 춥고 배고픈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

교수님은 박물관 해설사처럼 설명하면서 직접 사진을 찍어주셨다. 설명만큼이나 사진찍기도 열성적이었다. 열성적인만큼 요구사항도 많았다. 잔디마당에서 건물을 올려다보면 하늘을 이고 선 ‘기산 음악 박물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 양 쪽으로 살짝 휘어진 가늘고 키가 크고 유난히 솔이 무성한 소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교수님은 어디서 어떤 포즈로 찍든지 하늘과 박물관 건물과 소나무 두 그루를 넣어 찍기를 요구하셨다. 파라솔을 펼치고 의자를 내놓아 앉아서도 찍게 하고 그네의자에 앉아서도 찍게 하셨다. 우리는 제자들답게 교수님이 요구하는 데로 유쾌하게 잘 따랐다. 첫 대면의 어색함 따위는 주차건으로 반이 날아갔고 마당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반이 날아갔다. 우리는 오래 교류해 온 지인들처럼 짧은 시간 동안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편안해졌다. 눈을 찔러오는 햇살 때문에 손차양을 만들자 사진을 찍으려던 교수님이 그늘진다고 손차양을 내리라고 했을 때 싫어요 전 가릴거예요 저도 고집 있어요... 하고 장난스럽게 삐딱하게 굴 정도였다.


추위와 허기를 잊게 한 박물관 탐방


야외에서의 시간을 끝내고 박물관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겨울이 오면서 거의 비어 있던 콘크리트 건물 안은 얼음 같은 냉기로 채워져 있었다. 3층 카페부터 먼저 올라가자고 했다. 전기난로가 켜진 창가 테이블로 우르르 몰려갔다. 탁자 위에 귤 네 개와 초코칩 네 개를 준비해 놓아 웃음을 자아냈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자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더니 이어서 케이팝인 데몬헌터스 주제곡과 세계적 아이돌 스타인 로제의 아파트를 틀었다. 우리가 왔다고 김광석이나 조용필을 틀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키오스크로 주문한 커피와 흑임자라떼는 교수님이 직접 만들었다. 함께 마시면서 교수님은 조부이신 기산 박헌봉 선생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40여 년의 대학교수직 은퇴 후 6년 전 이 양평에 땅을 사서 박물관을 지어 2024년 5월 개관하기까지의 행정적 절차의 번거로움과 복잡함과 수고로움을 토로하고 공들인 인테리어를 자랑하셨다. 이미 한참 늦어버린 점심시간도 지나가고 있는데 교수님은 설명을 멈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오자는 건의도 슬쩍 해 보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며 우리를 2층으로 데리고 갔다. 아니 양떼처럼(?) 몰고 갔다. 잠긴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쓰고 콧수염이 단정하고 턱선이 날렵한, 교과서에서 본 듯한 일제 강점기의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한 기산 박헌봉 선생의 커다란 초상화가 우리를 맞이했다. 아쟁과 거문고와 북 등 국악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과 박정희 군부시대의 실세였던 김종필과 찍은 사진, 그리고 이병각(삼성 창업주 이병철 친형) 이병철 등 경제계 인사들과 주고받은 서신들, 독일 뤼브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독일문화훈장, 금관문화훈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관문화훈장 제 1호는 무용가 김승희... 들어봤지? 9호는 주시경, 그리고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배우 윤여정 가수 이미자... 이런 분들이 받은 훈장이야... 우리 어른이 2호야 금관문화훈장 2호... ”

한쪽 벽면엔 기산 선생의 생애가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1960년 국악예술학교를 창립하셨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 관현악단을 만들었고 인간문화재 제도 즉 지금의 무형문화재를 만들어 가난한 예술인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었고....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음악협회에 서양음악인 양악부와 일본음악인 방학부만 만든거야... 우리 국악은 빼버리고... 그래서 우리 어른이 조선악부를 만들어 이동백 박녹주 등 명창과 박춘재 김봉업 등 산대놀이 명인들을 데리고 여러 고장을 돌며 판소리와 탈춤 공연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을 들락날락 하다가 해방을 맞은 민족운동가셔... ”

그러면서 한 사진을 가리켰다.

“윤봉길 의사의 후손들이야... 이렇게 직접 방문해 주셨어... 참... 감사하고... 뜻깊고 보람있었지... ”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그 후손에게 직접 듣는 감회에 우리는 잠시 추위와 배고픔을 잊었지만 2층을 나와 다시 문을 잠글 때는 춥고 배고프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시간은 오후 네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교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일 층으로 내려가 잠긴 문을 또 활짝 열었다.

1층은 3만여 권의 도서가 갖춰진 도서관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모던과 앤틱이 조화로웠다. 처음 보는 서도 민요, 아리랑, 한국민요집 등 오래된 국악 레코드판들은 시간을 잊게 만들었다. 이 많은 오래된 자료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산 선생은 71년 70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약 7년 동안 중풍으로 한쪽 손발을 쓰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구술로 <국악대관>의 저술 작업에 몰두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또다시 추위와 배고픔을 잊었다. 중앙에는 백여 명이 신발을 벗고 앉아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그리고 한쪽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유아 도서와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할 수 있는 태이블을 마련해 놓았다.



혼자 빚나는 별은 없듯이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박물관을 나올 수 있었다. 교수님의 단골 소불고기집으로 안내되었다. 맛도 좋지만 신체가 구부정한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더욱 자주 온다고 하셨다.

식사 중에도 교수님의 박물관에 대한 홍보는 계속되었다. 양평에는 두물머리 양수리 황순원문학관 세미원 용문산 등이 가볼만한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기산 음악 박물관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양평군 홈페이지에 들어가 기산음악박물관을 찾아 클릭을 해서 조회수를 높혀 달라고 하셨다. 음악박물관에 대한 교수님의 애정과 열정은 그렇게 한겨울에 방문한 달랑 네 명의 제자 앞에서도 마치 수백 명의 제자들 앞에서 강의하듯이 뜨거웠다.

돌아오는 길의 저녁 노을은 유난히 선명한 주황빛이었다. 예상을 훨씬 넘은 늦은 귀가길이 되었고 춥고 배고픈 시간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얼마 되지 않은 박물관 탐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 같았다.


배우 안성기 님이 영면에 드셨다. 안성기님과 박중훈님이 주연으로 나온 ‘라디오스타’라는 영화가 있다. 박중훈님은 말썽꾸러기 사고뭉치 스타로 나오고 안성기님은 그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매니저로 나온다. 매니저 안성기가 스타인 박중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다고,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라고...

국악에 문외한인 나도 손소희 한덕수 등 명창과 명인들의 이름은 어쨌든 매스컴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길러 낸 기산 박헌봉 선생은 솔직히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산 선생은 우리나라 국악의 매니저 역할을 하신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엄혹한 시대에도 국악이라는 별을 온몸으로 지키고 비추어 오늘날 세계에서 빛나는 케이팝이라는 별로 빛날 수 있도록 그 기초를 마련해 주신 분이라고.

그리고 그의 뜻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이 겨울 양평의 추위 속에서 따뜻한 봄과 찾아줄 사람들을 기다리는 교수님은 아마도 대를 이은 우리 시대 국악의 매니저가 되신 듯 하다. 이제 어디선가 우리 가락이 들려오면 기산 박헌봉 선생과 교수님을 떠올릴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 옆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말할 것 같다. 양평에 기산음악박물관 있는거 알아? 거긴 말이야....



기산 박헌봉 선생은 ---------------

기산 박헌봉 선생 (1906 ~1977)은 일제강점기인 1930 ~ 40년대에 일제가 조선음악협회에 양악부와 방학부(일본음악)만을 조직한 것에 맞서, 조선악부를 만들어 상무이사로서 이동백 박녹주 등 판소리 명창과 박춘재 김봉업 등 산대놀이 명인들 60 ~ 70명을 꾸려 평안도와 전라도 등에서 공연을 하여 체포 구금을 당하는 등 민족음악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해방후에는 문화재위원으로서 인간문화재 제도(현재의 무형문화재)를 창안하고 국악예술학교를 창립하였으며 최초로 국안관현악단 (현 서울시립국안관현악단)을 만들었다. 현재의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대한국악원장을 세 차례 연임하였고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함경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전라도 경상도를 돌면서 민요, 판소리, 잡가, 남사당 놀이 등을 릴테이프에 채록하여 자료의 일부를 국가에 기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창설하여 한국음악을 전공하는 예술인들을 교육하는 데 앞장섰을뿐더러 한국전통음악예술단 30 ~ 50명을 이끌고 독일, 일본, 미국 등 세계를 돌면서 부채춤과 농악 등을 선보여 오늘날 한류의 기반을 다졌다. 양평에 기산박물관이 세워진 계기는 함경도부터 강원도와 경기도를 거쳐 전라경상도를 돌면서 한국민속음악을 채집하던 중 두물머리 근처에서 머물며 경기민요 등을 채록했다는 증언과 기록에 근거한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창악이론서인 창악대강 출판으로 서울시문화상과 한국일보 출판문화대상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음악을 집대성한 국악대관을 집필하던 중 병환으로 1977년에 별세하였다. 정부는 기산의 고적을 기려 1974년에 새롭게 제정된 금관문화훈장 제 2호(1975)를 수여하였다. 〈기산음악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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