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로 돌아온 진심어린 한 줄 문장의 힘!

by 찌니


회사 회식을 하고 밤 11시 가까운 시간에 귀가한 아들의 손에 선물세트가 들려 있었다. 딱 봐도 연말 선물로 많이 오고가는 한우세트였다. 크고 묵직했다. 아들은 유난히 요란하고 당당하고 활기차게 거실을 지나 주방의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얼굴에 미미한 열기와 흥분이 보였다. 한우의 힘(?)과 회식자리에서의 술과 밖에서 묻어온 영하로 떨어진 찬 공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와우... 한우네...벌써 연말 선물이야?


물었더니


아니야... 나 이거 추첨에서 일등으로 뽑혀서 받은거야 일등으로...

아들은 일등 성적표를 자랑하는 소년처럼 말했다.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편도 슬금슬금 주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뭐라고? 추첨에서 일등으로?

목청이 저절로 높아졌다. 나는 포장을 벗기고 싱싱하고 신선한 붉은 빛이 도는 1+ 꽃등심과 채끝살 한우를 손으로 쓸었다. 그것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나누어 준 평범한 연말 선물이 아니었다. 아들에게만 손 내밀어 준 ‘행운’의 증표였다. 행운은 ‘여신’에 곧잘 비유된다. 우리는 정말 ‘신’이라도 영접한 듯 한우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섰다. 나의 흥분된 수다가 시작되었다.


세상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 많은 행운권 추첨에서 치약 세트 하나 뽑힌 적 없는데... 그치 여보? 올해 가을에만 해도 전통시장 먹거리 축제나 음악 축제 행운권 추첨에서 다 꽝이었잖아... 그런데 우리 아들은 일등으로 뽑혔네... 세상에... 행운이 말이야 우리에게 그토록 인색하게 군 게 미안해져서는 아들인 너에게 몰빵해 주기로 했나 보다... 그래... 우리에게 좀 와 줄 때도 됐지 뭐...

나의 수다는 못 말리게 감격스럽고 유쾌했다. 남편도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아들은 나의 과한 반응이 무안했는지 일어나 정수기로 가서 냉수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회사의 연말 이벤트로 회식 시작할 때 나누어 준 번호표 추첨에서 뽑힌 줄 알았다. 나의 좀 과장된 흥분이 지나가고 찬물을 들이킨 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방법이 아니었다.

아들과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을 종합해서 내 나름대로 그날을 되살려 보았다.

회식이 있던 그날 홍보부에서 직원들에게 올 한 해 근무하면서 느낀 점이나 회사에 하고 싶은 말이나 자신의 포부 등을 간단하게 써서 보내라고 메일을 보냈다. 홍보부에서는 직원들이 보낸 글을 프린트해서 오려서 스탠딩 보드에 붙였다. 회식이 마무리될 무렵 부서의 최고 상사인 팀장이 앞으로 나섰고 간단한 인사말 후 홍보부에서 이벤트로 준비한 스탠딩 보드를 마주했다. 보드에는 똑같은 크기 똑같은 글꼴의 문장이 프린트된 크고 작은 용지들이 바닷가 바위 위의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내용은 미사여구의 문장, 아부성 맨트가 들어간 문장, 회사의 발전을 기원하는 문장, 자신의 당찬 포부를 밝힌 문장, 유명인의 글을 가져온 문장, 책 속의 한 문장을 인용한 문장 등 다양했다. 팀장은 보드를 눈으로 꼼꼼히(혹은 대충 대충?) 읽어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 마음이 가는 글귀가 쓰인 용지를 향해 팔을 뻗어 손으로 떼어냈다. 팀장이 떼어낸 용지의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을 써낸 직원이 달려 나와 상품을 받아 들어갔다. 맨 밑 등수부터 시작됐다. 생활용품 세트가 나가고 타올 세트가 나가고 참치 세트가 나가고 와인 세트가 나갔다. 드디어 마지막 한우 세트가 남았다. 기대의 시선들이 집중되었고 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시간을 들여 보드 위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일등 한우 세트를 안겨 줄 문장이 프린트된 용지를 떼어냈다.

자... 읽겠습니다.


모두 숨을 죽인 듯한 정적이 흐른 후... 팀장이 문장을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업무 적응을 위해 도와주신 모든 팀원분들 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누가 써 낸 건가요? 이 글을 써 낸 직원 분...

그때 구석진 자리 어디 쯤에 앉아 있던 아들이 엉거주춤(어쩌면 벌떡?) 일어섰다. 아들은 직원들 사이를 흐트러진 식탁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에선 어쩌면 우우우... 함성을 질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띄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은 팀장으로부터 한우 세트를 받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며 그 분위기에 답하듯이 쑥스러운 브이 자를 그려 보였을 수도 있겠지...

아들은 일 등으로 뽑힌 종이를 주머니를 뒤져 꺼내 보여 주었다.

「업무 적응을 위해 도와주신 모든 팀원 분들 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큰 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읽었다. 아들에게 행운의 일등 당첨이라는, 한우라는 선물을 안겨준 문장은, 팀장의 마음을 끌고 행운의 여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문장은, 그렇게 간결하고 단순하고 평범했다. 팀장은 그 짧은 문장에 들어 있는 아들의 진심을... 보았던 걸까?

아들은 올해 9월 말 우리 나라에서 대기업이라 불리우는 이 회사에 취직했다. 신입으로 취직했으며 나이는 서른 둘이다. 채 3개월이 되지 않은 신입사원인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힘들고 긴 취준생 생활 후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서 한 달 만에 이유도 모른 채 퇴사를 당했다. 또다시 일 년 여의 취준생 생활 끝에 이름난 중견기업에 입사했다. 경기도의 어느 연수원에서 한 달의 연수를 받고 돌아온 아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여 사회라는 거대 조직 안에 무사히 안착하는 줄 알았다.

아들은 일 년을 겨우 채우고 퇴사했다. 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나지도 않은 시기부터 동기생들이 하나둘 퇴사를 한다고 했다. 회사의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권위적이라고 했다. 아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취준생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최소한 3년은 버티어서 경력을 쌓을 거라고 했다.

퇴사할 즈음 아들의 방에서 약 봉투가 자주 발견되었다. 머리가 좀 아프다고만 했다. 그것이 직장 상사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걸 알고도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는 말을 한동안 해주지 못했다. 물론 부모의 그런 말이 아들의 결정에 큰 역할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말 한마디가 위로와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할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말을 해주기가 그토록이나 힘들었다. 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취준생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막막한지 너무도 잘 아니까... 힘들어도 그 시기만 넘기면 되지 않을까... 했었다.


서른한 살 봄, 아들은 또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또다시 고립과 고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집을 나가 늦은 밤 귀가했다. 가끔은 새벽녘에 들어와 안경을 쓴 채로 술 냄새를 풍기며 환한 대낮까지 잠들어 있기도 했다. 대화가 없어지고 서로 서로 외면하기 바빴다. 9월부터 코딩 교육을 시작해서 올해 2월에 수료했지만 그 코딩 수료증으로 가고자 했던 기업에의 입사는 좌절되었다. 그로부터 9월이 오기까지 아들은 겨우 서너 번의 면접을 갔을 뿐이었다. 수없이 많은 고배를 마셨을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 하반기 모집도 끝나가는데... 연말이 다가오는데... 내년이면 벌써 서른 셋인데... 매스컴에서는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아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들 하는데 내 주위 친구의 아들들은 어쩜 그리도 모두 직장을 잘 다니고 있고 결혼까지 척척 잘도 하는지...

매일 밤 자정이 가까워서야 귀가하는 아들을 우리는 혹시 피씨방에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었다. 늦은 밤 산책길에 피씨방 앞에서 들어가 볼까 망설이기도 했었다. 그랬다가 정말 아들이 피씨방에 있으면... 어쩔건데... 어쩔건데... 그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선 적도 여러번 있었다. 한 번은 아들을 발견하고 몰래 미행을 한 적도 있었다. 아들이 가는 방향은 집이었지만 밤 10시가 좀 넘은 시간에 귀가할 리가 없다면서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뒤를 밟았던 것이다. 반쯤은 장난이고 반쯤은 불신이었던 그 밤, 아들은 다행히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행동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한편 우습기도 해서 밤의 어둠을 방패 삼아 거리에 서서 한참을 끌끌거리고 웃었었다.

취직이 된 후 첫 월급날 외식을 하는 자리에서 웃으면서 이런 얘기들을 했다. 그런 날들을 즐거웠던 추억처럼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우리에게 온 것이었다.

혹시 아들은 옛 직장에서의 트라우마로 혹시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꺼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뭘 잘못했나... 우리가 아들에게 잘못된 무언가를 주입했나... 그렇게 자책도 하며 서로에게 무언의 상처를 주고 받으며 지쳐갈 무렵 취직이 되었던 것이다. 작은 기적과도 같이...

그날 밤 아들의 문장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왠지 그 문장을 버릴 수가 없었다. 감동과 회상이 지나가고 마지막에 오는 감정은 ‘부끄러움’ 이었다. 짧고 간단하고 평범하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데 내가 쓰는 글들은 길고 장황하고 핵심을 집어내기 힘들기만 하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도 짧고 간결하게 쓰자고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한정 없이 길어지고... 길어지고 있다.... 어쩌면 좋은가....

책도 죽어라 안 읽는 너도 이렇게 짧은 글로 한우를 타서 오는데 나는 이게 뭐냐 아들... 쓸데 없는 쓰레기 같은 글이나 써대고 있으니... 어쩌면 좋으냐 아들...

나의 이 한탄과 자책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글로 쓰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아... 대충 쓰는 데도 잘 썼단 소리 들어... 엄마 닮아서 그래...

#취업 #회식 #이벤트 #아들 #한우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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