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약에 우리>관람 후
심장도 떼어줄 거라던 그들의 빛나는 사랑은 애착하는 소파 하나 들여놓을 수 없는 좁고 옹색한 공간에 살게 되면서 그 빛을 빠르게 잃어간다.
발뒤꿈치가 벗겨지는 고된 노동과 원치 않는 직장에서 당하는 모멸의 날들이 이어진다. 꿈과 희망은 거듭거듭 좌절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에도 화를 낸다. 너를 만나고 눈물이 많아졌다는 말에도 짜증을 낸다. 가난은, 거듭된 좌절은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좀먹어갔다. 웃음과 대화와 사랑의 몸짓으로 충만했던 그들의 좁은 공간엔 무력한 분노와 원망과 외면으로 누추할 뿐이다.
은호(배우 구교환)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쓰고 내내 게임만 하고 있다. 정원(배우 문가영)이 가만히 일어나 커튼을 열자 벌떡 일어나 거칠게 커튼을 닫아 버린다. 정원은 조용히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간다. 뒤늦게,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은호는 달려 나간다. 지하철로 뛰어 내려간다. 거기, 출발 직전의 지하철 안에 서 있는 정원을 발견한다.
은호는, 정원이 떠나려고 서 있는 지하철 안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는다. 정신없이 뛰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아니 조금 뒤로 물러서기까지 하면서, 그대로 서 있다. 정원이 탄 지하철이 떠나고, 은호는 멀어지는 정원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둘은 헤어진다.
우리는 지하철이 아니라 우리가 월세로 살던 동네의 아주 늦은 밤의 어두운 골목길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뛰어나와 나를 붙잡았다.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아니 우린 헤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남편은 내가 타고 떠나려던 지하철에 주저 없이 올라탄 셈이 된다. 아니 어쩌면 좀 주저했을지도.
아들이 기간 만료 직전의 영화 티켓을 주었고 나는 남편의 취향을 고려해 <아바타>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집 근처 영화관의 우리가 볼 수 있는 상영 시간은 밤 8시 40분이었다. 더구나 러닝 타임이 3시간. 남편은 포기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내 취향인 <만약에 우리>를 결정하고는 보다가 졸지나 마... 티켓 사용 기간만 넉넉하면 친구랑 볼 영화인데...라고 말했다.
남편은 졸지 않았다. 졸기는 커녕 지루해하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나는 남편의 집중이 이해되었다. 은호와 정원이 좁은 반지하방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장면쯤에서 나는 남편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귀 가까이 대고 물었다.
“완전 옛날 우리 모습이지?”
남편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요란한 이별의 위기를 넘긴 후 다시 시작하며 나는 이런 마음이었다. 내가 태극기를 달고 뛰어 국가를 빛낼 인생도 아니고 꼭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을 남길 위인도 못되고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 것도 아니라면, 말하자면 평범하게 속되게 살 거라면, 이 남자를 위해 살아보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한 세계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나.
난 그렇게 비장했다. 비장해야만 견딜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특히 옹색한 반지하 방 안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고 함께 있는 장면, 그건 오래전 우리의 모습이었다. 돌아보기도 끔찍한, 서로를 고문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은호와 헤어진 정원이 달리는 버스에 앉아서 온 얼굴을 구기며 비통하게 우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도 그 무렵 버스 안에서 전철 안에서 낯선 골목을 무작정 걸으며 그렇게 울었던 날들이... 참 많았다.
헤어진 후 그들은 꿈을 이루었다. 정원은 건축사가 되었고 은호는 자신이 개발한 게임으로 성공한 유부남이 되어 있었다.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그들은 눈물을 쏟으며 애통해한다. 만약에 우리... 만약에 우리...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남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며 말했다. 우린 헤어졌어야만 했어! 그때 헤어졌어야 했어!!!
허허허, 남편이 소리 죽여 웃었고 크크크, 나도 웃었다.
작가 은희경은 단편소설 <빈처>에 이렇게 썼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남루한 일상을 남길뿐인가.
늦은 밤 남편과 함께 영화관을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며 나는 문득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의 날들을 견디고 지나면, 가난한 젊은 날 저주 같았던 사랑도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이 되어 돌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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