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도 지난 강추위 속에서, 드디어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 나갔다. 도로주행교육 1일 차 두 시간. 오늘도 강사는 친절하지도 적극적이지도 않은 나이 드신 분이었다.
어릴 때는 물론 지금도 신기하고 놀랍다. 도로의 그 많은 차들이 충돌하거나 부딪치지 않고 하나의 커다란 물결처럼 유연하게 흐르듯 달리는 것이. 나는 그 물결에 얹혀가는 승객의 역할로 끝날 줄 알았다. 나 스스로 그 물결 중의 한 줄기를 조정하는 운전자가 되는 일은 이 생에선 없을 줄 알았는데.
12월 29일
두 번째 도로주행 교육
이번 강사는 가장 친절했다. 말투가 부드럽고 다정해 조금도 기를 죽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나 조곤조곤 부드럽게 가르치고 지적하는 건 정말 좋은데 뭐랄까, 너무 세세하게 지적해서 20점 정도를 깎아먹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조금만 차체가 흔들려도 또 급하게 밟으셨네... 그렇게 밟으면 안 된다니까...... 천천히 스르르 미끄러지듯 밟아도 선다니까...
속도를 조금만 올려도
에헤이 너무 빨라 빨라... 속도가 일정해야지...
1일 차 강사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가던 것까지 다 지적했다.
아휴...
2022년 1월 6일
세 번째 추가 도로주행교육
오늘은 교육시간이 오후 5시 20분. 고교졸업생과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로 시간 잡기가 어려워서 겨우 잡은 시간이다.
어두워지는, 어두워진, 더구나 퇴근시간. 그래서 헤드라이트 불빛 휘황한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았다. 4 개 코스 중 안 가본 두 개 코스를 주행했는데 못 말릴 길치인 나에겐 도무지 입력이 안 되는 코스다.
더구나 밤.
저 길이 저번에 했던 A 코스잖아요... C코스는 여기서 이렇게 가는 거지... 그리고 저기서 겹치는 거지... 알겠어요?
아 네 네.... 대답은 하지만 도통 모르겠다. 이 도로가 그 도로 같고 그 도로가 이 도로 같다. 코스도 코스지만 신호등 보면서 브레이크와 엑셀로 옮겨가며 그것도 강약을 그때그때 조절해야지... 보행자 옆차 앞차 속도계 깜빡이 미러... 봐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머리가 뒤죽박죽 엉켜서 꽉 찬 상태다. 거기에 코스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내일이 드디어 도로주행 시험!!
안 되겠지?
안될 거야..
주변의 지금 능숙한 자가운전자들 대부분 한두 번 떨어졌대잖아?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기..
또 우황청심원을 샀다.
1월 7일 오후 한 시.
도로주행 첫 번째 시험
20대 초 앳된 여자애랑키가 크고 곧고 마른 체형에 길쭉한 얼굴 히끗한 스포츠형 머리가 해병대 출신 같이 강인해 보이는 시험관이랑 노란 도로주행 차에 탔다. 코스 선택 랜덤에서 여자애가 A코스가 되었고 나는 자연히 B코스가 되었다. A코스가 더 쉬운데... C, D 코스가 안된 것만도 다행이다.
여자애는 침착하게 잘 출발했는데 중간에 도로에 잘못 들어가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시험관이 바로 실격이라 했다. 자기가 브레이크 밟지 않았으면 사고 났다고...
드디어 내 차례다.
무리 없이 잘하는 것 같았다. 걱정했던 차선변경도 잘하고 신호도 잘 지키고 멈추면 중립으로 바꾸는 것도 안 잊어먹고... 중간에 방향지시등 켜는 건지 끄는 건지를 잊어버린 것 같기는 한데...
거의 다 왔지? 와 이거 합격인 거 같은데...
첫 주행시험인데 일단 끝까지 온 것이 기적 같았다. 동승한 젊은 여자애도 금방 실격되었는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주황색 신호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급브레이크...
끼익!!
흥분했나... 방심했나.... 거의 다 와서 잠시 신호등을 놓쳐버렸다.
그때서야 말 한마디 않고 있던 시험관이 말했다.
ㅡ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기가 어디지? 꿈에서 금방 깬 듯 몽롱했다.
ㅡ아.... 여기가... 어디죠?... 어디로... 가야...... 하죠?
시험관이 어이없다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ㅡ우회전해야는데 지금 직진하는 차로에 있잖아요... 이 차로는 나가는 차로예요... 우리는 우회전해서 들어가야 하고... 점수 미달 불합격이에요...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르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ㅡ어머 왜요? 나 잘한 거 같은데...
시험관은 자신이 갖고 있던 태블릿 피씨를 들여다보며
ㅡ방향지시등도 몇 번이나 안 껐고요... 첫 시동도 잘못 걸었고요... 안 해도 될 차선변경도 했고요... 속도도 일정치 않았어요.... 또.... 또...
우황청심원 부작용인가??
1월 한 달을 다 써야 되려나...
일주일 후로 시험날을 또 잡고 또 55000원 결제하고
터덜터덜 또 패잔병이 되어 학원문을 열고 나오는데 학원 앞 장내기능시험 수험생 대기실에 수험생들이 여럿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운전면허용 노란 차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험장을 보고 있다. 그렇게 봐서 그런가 모두 불안 초조해 보였다 내가 그랬듯이.
돌아서 나오며 맘속으로 씩 웃었다.
나, 저 과정, 지나왔지요......
오늘도 이렇게 작고 한심하고 유치한 나를 본다. 같이 시험본 여자애가 떨어진 것에 그리고 저런 모습들에 위로받는 나를.
학원에서 준 (명장시대) 무료 커피권으로 학원 근처 커피숍을 찾아갔다
커피숍이 아니라 대형 베이커리 카페였다.
빵과 커피를 들고 창가자리에 앉아 나달 나달 해진 도로주행 코스도를 펼쳤다. 아 내가 여기서 넘어가버렸군. 제일 자신 없고 어려워하던 게 차선변경이었는데 왜 안 해도 되는 차선변경을 했을까... 과도한 자신감이었나? 그렇다면 진짜 우황청심원 때문인가??
세 친구 단톡에 톡이 와있길래 읽다가 나의 불합격 소식과 그 이유를 대충 써서 보냈다.
ㅡ기본적으로 떨어져 줘야 인간적이지
한 친구는 이렇게 보냈고
또 한 친구는,
ㅡ역시 너다운 도로주행을 했구먼...
이 친구가 특히 나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 가장 잘하는 말이, 역시 너답다, 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정해주고 싶다.
진짜 나는 그렇지 않아...
그들에게 나는 늘 건강하고 씩씩하고 밝고 유쾌한, 같이 있으면 늘 즐거운 아주 아주 외향적인 친구이다.
아닌데...
그건 나의 아주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
가방에 넣어온 책을 꺼내본다.
ㅡ2021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마음의 부력ㅡ
구매한 지 한 달도 훨씬 넘은 거 같다. 겨우 대상 수상작 '마음의 부력'과 자선 대표작 '부재증명'을 읽었을 뿐이다. 다른 작품을 읽기엔 머리도 맘도 어수선하여 밑줄 그어 놓은 곳을 슬슬 다시 읽어 본다.
그리고 '부재증명' 중 유독 두껍게 밑줄 그어진 문장을 읽었다.
나는 가끔 불안에 싸이고 자주 혼란에 빠지고 종종 분노한다. 긍정과 부정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붙어서 끊임없는 착란을 이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유혹처럼 끼어들 때도 있긴 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제거하면 아예 내가 없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한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내가 있을 수 있고 또 타인의 시선과 견해가 부분적으로 나를 형성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진실일 수 있다. 겉사람과 속사람 혹은 내 안의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익숙하다
ㅡ나는 가끔 불안에 싸이고 자주 혼란에 빠지고 종종 분노한다. 긍정과 부정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붙어서 끊임없는 착란을 이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