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어내도 다가오던 그 뜨거운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쓸쓸히 서로를 연민하는 날들만 남아 있을 뿐...

by 찌니

10년 넘게 쓴 소파를 드디어 버리고 원목황토카우치를 들였다. 열선이 깔려 있어서 전원을 켜면 온돌방의 뜨끈뜨끈한 아랫목 같다.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 아들에게 '아들아 이제 우리의 몸은 푹신함 보다는 뜨끈함을 원한단다...'라고 말해 줬다.

남편과 티브이를 시청할 때면 어느새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두고 티브이를 향해 저마다 쿠션을 베고 누워 있다. 자연스럽게 네 개의 다리가 엇갈려 만난다. 가끔 심심하거나 장난기가 발동하면 내 다리로 남편의 다리를 얽는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 남편의 헐렁한 실내복 바짓가랑이 안으로 발을 들이밀어 넣는다. 제지를 하거나 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으면 남편의 허벅지 깊숙한 곳까지 다리를 밀어 넣고 발가락으로 남편의 살을 누르고 간질이고 쑤셔도 본다. 물렁하고 미지근한 남편의 다리를 그렇게 공략해도 아무런 느낌도 반응도 없다. 티브이 시청에 방해가 되거나 성가실 정도가 되면 남편은 어른이 아이의 행동을 제지할 때의 행동처럼 입으로 공기를 짧고 강하게 쓰읍, 들이마시면서 눈을 흘긴다. 그러면 내 다리는 패잔병처럼 슬그머니 철수한다. 가끔 괜히 무안하거나 쓸쓸해지면 화난 듯 발딱 일어나 주방으로 가면서 "나 커피 마실 건데... 줘?" 하면서 퉁명스럽게 물어본다.


밀어내도 밀어내도 바위처럼 당당하게 다가오던 검은 머리 빛나는 눈동자의 그 젊은 남자, 닿기만 해도 뜨거워지던 우리의 그날들은 갔다, 가버렸다. 그리고 '당신을 만났던 그날 그 주택가 골목(월간지 마감이 만들어준 남편과의 인연, 글에 나오는)에 다시 들어가라 하면 나는 차라리 무간지옥을 택하겠다'라고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대던 미움과 원망의 날들도 가버렸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뜨거운 사랑도 날 선 원망도 없는 미지근해진 마음과 물렁해진 몸을 뜨끈한 온돌 위에 누이고 쓸쓸히 서로를 연민하는 날들만 남았을 뿐...

그날들이 적당히 남아 있기를 바란다.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게.






우리가 주말에 챙겨보는 드라마는 '조선거란전쟁'과 '웰컴투 삼달리'다.


'웰텀투 삼달리'에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둘도 없는 해녀 친구 고미자와 부미자가 나온다. 물살이 세져서 물질을 하면 안 되는 어느 날, 물질을 하려는 고미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 같이 물질을 하게 된 부미자. 그날 부미자는 죽고 고미자는 살아남았다. 부미자의 남편 조상태는 고미자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고미자를 원망하고 미워한다. 20년이 넘도록 그 미움과 원망을 풀지 못한다. 부미자의 제삿날 고미자가 만들어 온 음식을 내동댕이치며 고미자를 향한 울분과 원망과 미움을 쏟아내는 장면을 덩달아 눈물을 흘리며 본 후 남편에게 물어봤다.


"당신은 어때? 만약에 말이야 내 친구 경과 내가 바다에 놀러 갔다가 내가 죽으면? 아니 그냥 놀러 간 게 아니라 경이 바다 보고 싶다고 졸라서 같이 갔다고 해야겠네... 그렇게 갔는데 내가 바다의 파도에 휩쓸려 가서 죽어버린 거야 경은 살아남고.... 그러면 경이 저렇게 미워질까? 어? 저토록 오래도록 미울까?"


남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티브이만 보고 있다. 못 들은 건가? 못 들은 체하는 건가? 아니면 어떻게 대답해야 무난할까 고민 중인가?


남편은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다. 연애할 때는 멋있어 보이던 그 젊잖은 성격이 오랜 결혼생활에서는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결혼상대의 성격 얘기가 나오는 자리에서 무조건 말 많고 가벼운 남자와 결혼하라는 조언을 했었다. 젊잖고 묵직한 성격은 연애할 때나 멋있어 보이지 몇 번의 권태기를 넘겨야 하는 길고 긴 결혼생활에서는 아주 좋지 않은 성격이라고.

그러면 가볍고 말 많은 동갑내기와 결혼한 친구는 반대로 말했다. 싸움 후 자신은 아직 화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벌써 헤헤거리면서 다가오는데 그것처럼 짜증 나고 보기 싫은 게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는 거보다는 그 편이 낫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곰보다 여우가 낫다는 말은 남편에게도 해당된다고.

그 친구는 '네가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라고 했고 나도 '너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라고 했다. 내가 겪고 느낀 게 정답이라는 고집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걸 보면 나의 사고도 많이 유연해진 듯도 하다. 세월이 변화시키는 것이 어디 몸과 마음뿐이랴....


그나마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호르몬의 작용인지 말을 좀 하는 편이긴 하다.


"어떨 거 같아? 저 조상태처럼 저렇게 내 친구 경이 미울 거 같아? 20년이 넘도록? 어? "

나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답을 해보라고 거의 닦달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얻어낸 대답은


"뭐... 밉겠지..."


라는 단 한마디.


'조선거란전쟁'을 보면서는 '강감찬'에 대해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저 전쟁이 몇 차 전쟁이지? 국사시간에 배웠잖아...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받아낸 게 몇 차 전쟁이었더라... 강감찬이 문신으로 나오네... 강감찬은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인데...그치? 무신 아니었나? (네이버 찾아보고) 아, 문신인데 무예도 출중했다고 나오네... 70대 나이게 전쟁에 참여한 문관 출신이라네... 아... 그렇군... 귀주대첩을 70살에? 와우...





내가 8개월여를 속이다가 드디어 퇴사를 알린 지 한 달 쯤이 되었고 우리 부부는 이런 별거 없는 고만고만한 주말을 보내고 있다. 맞벌이라 해도 둘 다 주말 휴무가 당연히 보장되는 직장이었으면 이런 시간이 새삼스럽지 않았겠지만 나는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생활을 10년이 넘도록 해 왔다. 당연히 둘이 함께 있는 이런 주말의 여유를 거의 누리지 못했고 그래서 아직은 주말을 온전히 함께 하는 요즘의 이런 날들이 조금은 새롭다.


'아직은' 말이다. 아직은....






비가 오다가 개인 일요일의 오후에는 오이도의 바다가 보이는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백합 칼국수와 오징어새우파전을 먹었다. 다른 해물은 전혀 들어가지 않고 백합만 넣었을 뿐인데 국물이 진하고 구수하고 깔끔했다. 나는 또 백합에 얽힌 추억 한 가지를 소환해서 떠들어댔다.


몇 년 전에 동창들 10여 명과 인천의 한 섬에 1박 2일 체험여행을 갔었는데 그때 바다의 뻘 깊숙이 들어가 백합을 채취했었다고. 얼마나 많이 채취했는지 그날 칼국수에 푸짐하게 넣어 실컷 먹고도 민박집 수돗가 고무 다라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고, 그런데 다음날 아침 집안일로 섬을 먼저 나가야 하는 한 남자동창이 수돗가의 그 백합을 가져가고 싶다고 했고 가져가라고 해서 다 가져갔다고. 나중에 어떤 술자리에서 한 동창이 백합을 가져간 그 동창의 행동에 대한 험담을 했다고, 어떻게 다 같이 캔 백합을 그렇게 가져갈 수가 있느냐고... 그때 내가 그랬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취할 수 있듯이(슬기운으로 좀 읏기는 비유를 한 듯) 용기가 있어서 백합을 가져갈 수 있었던 거야. 가져가고 싶어도 그깟 체면 때문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고...

내 말에 술기운이 도는 한 친구가 벌건 얼굴로 대들었지.

그건 얌체 없는 짓이지...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역시 술기운이 도는 나도 나의 의견을 거두어들이지 않았지.

그러니까 더욱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겠냐? 확실한 건 그 백합을... 조개의 여왕이라는 그 고급 조개인 백합을 챙겨서 가지고 돌아온 남편을 그의 아내는 아주 좋아했을 거라는 거.... 그 동창은 아마도 좋아할 아내를 위해서 얌체 없는 짓을 용기 내서 했을 거야...




그리고 백합의 속살을 떼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런 짓 절대로 못하지?


남편은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얼른 먹기나 해... 오래 끓이면 질겨져 맛없어..." 하면서 나의 식사라에 입을 활짝 벌린 백합 몇 개를 건져서 놓아 주었다. 나는 식탁에 놓여 있던 젓가락을 들고 남편이 놓아 준 백합의 속살을 떼어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가 예리한 바늘에 찔리는 듯한 느닷없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젓가락 끝이 냄비 밑의 부르스타 불꽃 속에 밀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젓가락의 끝은 불에 달궈져 끝이 거무스름하게 그을러 있었다. 그 달궈진 젓가락이 내 입술에 닿았던 거다. 젓가락이 닿았던 입술이 금방 허옇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남편에게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까뒤집어 보였다.

"벌써 부풀어 오르네... 찬물 좀 머금고 있어 봐...."

내 뒤집이진 입술을 살펴본 남편이 물 잔에 물을 따라 주면서 말했다.

그리곤 새 젓가락을 꺼내 놓아주고 부글부글 끓는 칼국수 안에 한껏 벌어진 백합을 건져 내어 속살을 떼어내서, 떼어 낸 속살만 나의 식사라에 자꾸 옮겨 놓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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