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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Feb 21.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설마, 맨드라미가 70

설마, 맨드라미가 



                  

아버지는 꽃을 좋아했다. 마당에 맨드라미, 금송화, 채송화, 봉숭아, 붓꽃, 유카, 해바라기가 계절을 바꿔갔다. 학교를 파하고 골목을 돌아 나온 나에게 해바라기는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맞아주었다.  

   

맨드라미는 여름부터 꽃이 핀다. 추석이면 엄마가 토방 아래 돌 틈에 핀 맨드라미를 따다 송편 위에 올려놓고 쪘다. 우리는 물든 보라색 송편을 먹었다.    

  

신문에 신안 병풍도에서 맨드라미 축제가 열렸다고 했다. 올림픽 공원에서 얼마 전 백 평도 넓게 핀 맨드라미를 보았다. 가을이 훨씬 지났는데 반가워 사진을 찍었다.   

   

작년에 이사 오자마자 꽃씨를 사다 뿌렸었다.  나는 겨울에는 맨드라미 꽃을 본 기억이 없다.  

   

연자방아 아래 국화는 있는 힘을 다해 서리를 맞으며 가물가물 눈을 뜨고 서 있다. 맨드라미는 국화 맞은편 마당 입구에 서 있다. 맨드라미는 국화 보란 듯이 빛깔을 잃지 않고 북쪽 칼바람과 눈보라를 맹렬하게 받아내며 서 있다. 고고한 수탉 벼슬 같다. 하도 장엄하게 서 있어 지나가는 등산객이며 동네 사람들이 씨를 받아갔다. 씨가 꽃 아래쪽 바깥에 붙어있어 손으로 훑기도 좋다. 그래서인지 아래쪽이 매끄러울 정도로 사람들은 내가 없을 때면 맨드라미 씨앗을 훑어버렸다.      

“아따 너무들 허네 아주 깨를 벳게불제”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자 노랑 빨강 국화는 색깔이 거무튀튀해졌다. 얼마 안 있다가 색깔이 아주 갔다. 맨드라미는 색깔이 흐려졌지만, 보라색이 잔영처럼 남아있었다. 그래도 색깔이 바래가는 것이 속상했다. 내 자랑이기도 했는데, 빛바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게 초라해 보여 어쩔 수 없이 한겨울에 뽑아버렸다. 감나무 밑에 쌓아놓은 낙엽 위에 뽑은 맨드라미들을 던져놓았다.    

 

이월 보름날 달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방 안에 앉아있기 아까울 정도로 밖이 환했다. 마당에서 걸었다. 무심결에 낙엽 위에 보라색이 보였다. 나는 가까이 가서 손으로 제쳐 보았다. 아직도 맨드라미가 제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꽃마다 그럴듯한 수사가 붙지만, 맨드라미를 오상고절이라 말하는 이는 없다. 흰 서리를 뒤집어쓰고 눈을 맞아도 제빛을 잃지 않는 맨드라미가 새삼 더 좋아졌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도 맨드라미 씨를 올봄에 뿌렸으면 한다.


맨드라미 꽃말은 영원한 사랑의 방패다. 내가 맨드라미를 닮아가는 건가? 방 안 온도가 7도다. 나는 꼿꼿이 앉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기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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