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이 가늘어졌다. 몸무게도 줄었다. 건강검진 할 때 발뒤꿈치를 슬쩍 들어도 키도 줄었다. 밥 먹는 양도 줄고, 라이브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줄고, 나를 찾는 핸드폰 벨 소리도 줄고, 친구들에 묻는 안부도 줄고, 자동차 주행거리도 줄고, 친구 집 방문도 줄었다. 사람에게 궁금한 것도 점점 줄었고, 저녁에 술 사러 마트에도 안 간다.
옛날에는 병어에 꽂히면 내 고향 신안 지도에서 한 상자 시켜 친구들 불러 질리도록 먹었었다. 근데 요즈음은 특별히 맛있는 것도 없다. 그리운 사람도 없고... 통장도 쪼그라든지 언제였던가. 이렇게 모든 게 줄었다. 그런데 한 가지 늘어나는 게 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는 죽음이라는 걸 모르고 그냥 울었다.
그 후 제부의 죽음이었다. 간암이었다. 당시 서른아홉이었던 제부는 어린 조카 둘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벽제에서 제부를 화장할 때, 내 안의 둑이 무너졌다. 눈물은 한 방울도 빠짐없이 흘러나갔다.
그때부터 누가 죽었다고 부고가 날아와도, 친척이 세상을 등졌다 해도,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례식장도 가기 싫었다.
내 안의 저수지가 새까맣게 말라버렸다. 밑바닥에는 가뭄이 든 것처럼 수많은 금이 그어졌다. 그 틈에 끼여 미꾸라지가 뒹굴다가 말라죽어갔다. 가슴이 미어터질 거 같은 일들이 많았지만, 그것을 바라본 내 눈길에는 먼지만 폴폴 날렸다.
그런데 오늘 평상에 앉아 블루투스로 제주 소년 오연준의 <바람의 빛깔> 듣는데 눈물이 났다. 청아한 바람이 폐 속까지 들어왔다. 내 안의 지저분한 것들이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다 말라버렸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됐을까....
십여 년 동안 같이 밥 먹고 뒹굴고 남 흉보며 기댄 나의 강아지, 산이를 보내고 난 후다.
나는 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산이를 앉혀 놓고 억울한 일을 이야기했었다. 산이는 내가 열변을 토하면 귀가 쳐지고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아예 차분히 듣겠다는 뜻이었다. 산이는 ‘이모 분 풀릴 때까지 허세요, 내가 들어 줄란 께요’ 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한 말 또 하고 또 하면 산이 턱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산, 자냐?" 라고 말을 하면 산이는 눈알을 굴렸다. 산이는 나의 동지였다. 산이는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랬다. 나는 산이가 떠난 후 잠가도 물이 새는 고장 난 수도꼭지가 돼버렸다.
담벼락 틈에 싹이 트는 것을 보아도, 지천에 핀 민들레꽃이 솜사탕처럼 지고 있을 때도, 평상에 앉아 있는 내 눈을 비추는 햇빛에도, 늦은 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다가도, 서로 밥을 양보하는 고양이들을 볼 때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노을을 등지고 폴더처럼 접혀 걷는 모습에도... 나는 속눈썹이 맞닿았다.
‘둑이 터졌나? 몸속에 누가 포클레인으로 저수지를 파놓고 갔나?’
눈물샘만큼 가뭄 안 타는 것도 없다는데 요새 그 말이 새삼스럽다. 주책없이 장소 불문하고 터지는 눈물 펌프질. 산이는 눈물 한 방울이 닫힌 내 어깨를 적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나를 지탱해 준 힘은 저 배아래 물방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마르지 않는 우물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상처받은 것들 앞에서 흘린 눈물이 내 슬픔을 닦아내는 것이라고 산이가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