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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May 20. 2024

불량품들의 사계

한강을 만들어버린 풀치 101

한강을 만들어 버린 풀치


        


상추가 나를 닮았나, 좀처럼 싹이 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뭐시든지 때가 있지. 공부도 , 옷도 , 노는 것도, 술도 때가 있지’ 밭고랑에서 쪼그리고 앉아 혼자 말을 하고 있었다.

“누님 뭐 하세요?”

“보면 모르것소.”

풀치를 보면 술은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는 혀가 꼬부라져 있지만,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손에 플라스틱 소주병을 들고 등산화를 신고 연자방아에 서 있다. 저 모습이 풀치 기본스텝이다. 풀치는 마당으로 터벅터벅 들어섰다. 얼마 전 교도소에서 나와 뽀얗던 얼굴이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 까맣게 탔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개들에게 말을 걸고 밤낮으로 싸돌아다니니 안 탈 수가 있나.

“오늘은 별로 안 마셨네? ”  

“헤헤.”

“누님, 대구 형수한테 통화 좀 해주세요.”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 허고 왜 통화를 해?”

“제 번호가 뜨면 전화를 안 받아서요.”

“됐어. 내 전화로 라는 말인디, 그럼 더더욱 못 허지!”   

  

나는 냉정하게 거절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고무호스를 가지고 마당으로 나갔다. 풀치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다.

“호두나무 밑으로 비켜서 봐”

나는 풀치를 저만치 가라고 하고 호스를 밭에 겨누었다. 그는 호스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보면서 전화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누군디?”

“형님!”

풀치는 내 왼손을 잡고 핸드폰을 들려줬다.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님입니다.”

“아, 네.”

“네에, 동생이랑 어떤 사이예요?”

“동네 누나입니다.”

“아, 동생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아, 예”

“제가 금방 갈 거니까 어디 가지 마세요.”

“여기가 우리 집이라 갈 데가 없어요.”

“40분 후면 도착합니다.”     


전화를 끊은 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났다. 형님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 사이 강남에서 사는 내 친구가 일요일이라 놀러 왔다. 마당 한복판에 서 있는 풀치 다리와 눈은 점점 풀렸다. 풀치는 혀가 꼬인 채 친구한테 말을 걸었다. 친구는 처음 보는 풀치 모습에도 놀라지 않았다. 친구는 웃으면서 마당 끝으로 갔다. 풀치는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내리고 그것을 밭으로 겨냥했다.

“야아, 안돼!”

나는 풀치에게 달려갔다. 평상에서 달려가 봤자 두 발짝이다. 나는 쓩 날아서 풀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풀치는 오줌을 누지 못하고 돌아서서 징글맞게 웃고 바지를 올렸다. 이 모습을 본 성길씨는 상추밭에서 풀을 뽑다가 실실 웃었다. 돌아 서 있는 풀치 바지 지퍼가 내려져 있었다. 등짝을 맞으면서 지퍼를 올리는 것을 잊은 거 같다.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일어난 일들이 친구에게 너무 창피했다. 풀치 때문에 마당이 참말로 듣도 보도 못한 싸구려 장터 같았다. 갑자기 그런 장터가  머릿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어느 날 고향 친구랑 이름난 시장에 간 적 있었다. 요즈음에도 저런 거를 파나 할 정도로 옛날 간 날 적 것 오만 잡동사니를 팔았다. 일단 더럽고 이상한 차림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친구는 주인들이 음식을 맛보라고 주면 받아먹었다.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정신 사나웠다. 친구를 졸라 서둘러 나왔다. 다시는 그 시장에 가지 않았다. 풀치 모습과 시장이 겹쳐 친구에게 창피했다.

강남 친구는 오히려 티브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서 즐기고 있었다. 괜히 나 혼자 지랄을 떠나 생각도 들었지만, 신경 쓰였다. 내가 이사를 온전히 오고 싶어서 왔고 또 집이라도 번듯하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나  스스로에 괜찮다고 하지만 이럴 때는 창피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아니면 창피한 생각이 드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휘감았다.  

    

마당은 세상 마지막인 것처럼 천덕꾸러기로 변했다. 풀치는 여전히 떠들고 서 있었다.

이때 집에서 성길씨 노모가 나오셨다. “왜 이리 시끄러워” 노모는 마당이 소란해서 나오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할머니는 풀치를 보자마자 가라고 손으로 밀었다. “너 얼른 집에 가라” 풀치는 마당 입구까지 떠밀려갔다. 풀치는 힘이 없어 밀려갔다기보다는 그냥 걸어갔다는 게 맞다. 할머니는 풀치에게 “마당에 발도 딛지 마”라며 소리쳤다. 나는 할머니 힘이 어디서 나는지 놀랐지만, 저렇게 매정하게 하는 게 더 의아했다.  

    

할머니는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평상에 앉았다. 나도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평소와 다른 자기 모습을 나 보기 민망해하면서 말을 꺼냈다.

“저놈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방문 고리를 잡아당기더니 방에다 오줌을 싸더라니까” 할머니는 그 일이 생각났는지 목소리가 최고 데시벨이었다. 어젯밤 성길씨는 한강이 돼버린 방을 닦느라 걸레를 몇 번이나 짜냈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제 엄청나게 바람이 불었다. 밭을 덮어 놓은 비닐에 바람이 들어가 비닐 펄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풀치는 평소대로 연자방아에서 떠들고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들은 척도 안 했다. 비닐 펄럭거리는 소리, 풀치 노랫소리, ‘아 지겹다 지겨워’ 얼마나 지났을까.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연자방아에서 트로트가 멈추기에 나는 풀치가 컨테이너로 가는 줄 알았었다.

풀치는 연자방아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우처럼 자는 풀치가 저 체온으로 죽을까 봐 성길씨가 질질 끌어다 방에서 재웠단다.

그랬더니 오줌 쌌다고 할머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구십이 다 되신 분이 정확한 발음으로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중계했다.

“저게 사람이냐고!”

“할머니, 그래서 방에다 조각배 띄웠소?”

“아들이 고생했지, 뭐.”

나는 할머니 곁으로 바짝 다가가 검지와 장지를 붙였다 뗐다 하는 시늉을 했다. 할머니는 부끄러워하며 입을 가리던 손으로 내 어깨를 살짝 때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길 씨는 표정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성길 씨는 풀치를 딱하게 생각해 챙길 때도 있었다. 성길씨는 어젯밤 두고 간 풀치 비니모자를 들고 나왔다. 풀치는 모자를 받아 머리에 삐딱하게 올려놨다.     

풀치 손에 들려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풀치는 휘청거리면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나에게 핸드폰을 주려다 넘어질 뻔했다. 풀치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풀치는 그걸 발로 밟고 나에게 전화를 던지다시피 들려줬다.

“여어보세요. 집이 어디쯤이에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형님은 숨이 찬 소리로 말했다.

“백 번 종점에서 백오십m쯤 올라오다 보먼 삼거리가 나와요. 거기서 연자방아 쪽으로 올라오먼 노란 페인트 집이에요.”

나는 숨찬 형님 목소리를 듣자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만 될 것 같았다.   

“대용 장갑이란 간판 앞이에요 혹시 아세요?”

형님은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소리로 말했다.

“저는 잘 몰라요 내비게이션 찍어 보세요.”

“자전거 타고 가요. 쫌만 기다려주세요.”

“뭐라고요? 오매 환장해 불겄네......”

형님은 언제 올지 모르겠고, 풀치는 거의 뻗기 직전이었다. 풀치는 반쯤 긴 눈으로 친구를 잡으러 다녔다. 친구는 풀치 주정을 날마다 보면 질렸을 텐데, 친구는 정말로 즐기고 있었다. 나는 환장하겠는데.   

   

그나저나 자전거 타고 온다는 형님은 오도 가도 안 하고. 그 형님이랑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이리 걱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놈의 오지랖은 어쩔 수 없다. 지인들이 나를 오지랖으로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따, 얼른 종점 내려가 봐, 형님 혼자 헤매는 것 같구만.”

나는 풀치를 기어이 떠밀어 보냈다. 지금 자전거 타고 오는 사람이 풀치 친형님은 아니란다. 그렇지만 나를 보러 오는 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풀치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걱정스럽네. 자전거 타고 한참 왔을 텐디......”

“사람 사는 것 같다야, 이런 일을 어디서 또 보겠냐.”

친구는 이 상황을 무척이나 재밌어했다.

“그나마 성길씨랑 나랑 술고래 말벗 해주는 거여. 돈은 어디서 나서 술 담배를 허는지. 그냥 짠 허지 뭐.”    

 

자전거 형님은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산 뒤로 넘어가자 다들 마당에서 물러났다. 새들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풀치는 알고 보니 곧바로 컨테이너로 가서 퍼 자고 새벽에 돌아다녔다. 자전거 형님은 나보고 풀치를 잘 좀 돌봐주라고 하려고 죽자 살자 페달을 밟았는데 오긴 왔는지...   

  

다음날 오전에 산에 가다 풀치를 마주쳤다.

“형님은?”

“못 만났어요.”

나는 욕이 나왔지만 참았다.

“너를 어쩔까, 지발 술 좀 그만 쳐......”

아침저녁으로 까마귀 울음소리와 풀치가 술 취해 부르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그렇게 고골 마을의 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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