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치는 내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왔다. 까불이가 텀블링을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삽을 내던졌다.
“언제 나왔어? 어디 갔다 온 거여? 알코올중독 병원?”
나는 속사포를 쐈다.
“어제 구치소에서 나왔어요.”
“어쩌다 들어갔어?”
“집행유예 기간에 술 마시고 땡깡 피웠어요.”
“소문이 맞아부렀네.”
동네 개도 없어지면 “요새 바둑이가 안 보이던 데”라고 물어보는데 풀치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개보다 못한 존재였다.
“아직 벌금 천이백만 원이 남았어요. 다시 들어가서 벌금 까야 돼요. 거기서 일하면 일 당 십만 원으로 쳐줘요.”
“또 들어간다고야?”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풀치가 자잘해 보였다.
"이제 무전취식으로 그만 들랑거리고 멋있는 일로 사고 치고 들어가! 나라를 위해서까지는 아니더라도,허구헌 날 무전취식이 뭐여! 쪽팔리게."
풀치는늘어난치즈 자르듯 내 말을 잘라버렸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요. 전기가 끊겼어요.”
그동안 전기세를 안 내니까 주인이 전기를 끊은 것이다.
풀치는 전기를 살릴 방법을 말하다가 집으로 갔다. 그때 성길 씨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풀치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좋았다.
“왜, 실실 웃어요?” 나를 보면서 성길씨가 말했다.
‘아따 실실이라니, 하옇튼 말 헐 줄도 몰라.’
나는 입 주위가 간지러웠다. 풀치가 왔다는 말을 할까 망설였다.
“술고래 왔어라이.”
나는 풀치가 무사히 나타난 소식을 알려버렸다. 그 말을 들은 성길씨가 말했다.
“아이고 큰일 났네.”
성길씨는 나랑 풀치랑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성길씨 얼굴이 차가워졌다. 풀치가 앞으로 마당을 차지하고 나랑 친하게 지내는 꼴을 봐야 한다는 질투가 섞여 있었다. 풀치는 언제부턴가 성길씨가 어떻게 생각을 하든 말든 자기 맘대로 행동을 한다. 그런 면이 나도 싫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고 살면 풀치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음 날 오전에 말끔한 눈으로 풀치가 마당에 나타났다.
“내가 너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디, 나중에 명예훼손 이런 거 해서 나를 걸고넘어지먼 안돼?”
“누님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인 줄 아세요? 베스트셀러가 돼야지!”
“옴매 이게 뭔 소리여!.”
내가 상상도 안 했던 말을 풀치는 쏟아놓았다. 나는 감동 먹은 표정을 숨기면 말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썻은께, 풀치가 마당에서 오줌 싼 거, 오아 따 소주 안주한 거, 평상에서 누워서 새벽까지 소리치는 거, 전봇대 밑에 불 지른 거, 경찰 오고 간 거 다 있는 일 맞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어요.”
밭 가장자리 돌팍 위에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있던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 마을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는 A4용지에 쓴 경위서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풀치는 물류창고에 컨테이너 이 층 하나를 얻어 쓰고 있었다. 현재 풀치가 사는 물류창고 주인이 풀치 선배인데, 월세가 밀리니까 선배가 사라져 버렸다. 여태 밀린 월세가 총 4천4백만 원이란다. “염병 많이도 밀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튀어나왔다. 땅 주인이 풀치가 구치소에 갔다 온 사이 주소 불명으로 처리해 버렸다. 풀치 말은 LH에서 신도시 개발 발표되기 10년 전 전입신고를 했다. 그런데 주소 불분명이 돼 영구임대 아파트를 못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껏 밀린 전기세 주겄다고 하고 땅 주인에게 전기 살려달라고 사정해 봐.”
"그 영감탱이한테요? 그럴일 없어요."
“안 된다고 하먼 성길씨에 월 십만 원씩 준다고 전입신고를 해주라고 해보든가.”
그것조차 안 되면 나랑 의논을 다시 하자고 하였다. 두 짱돌 머리를 맞대면 해결책이 나오겠지. 바닥을 쳤으니 솟을 일만 있지 않겠냐? 우리는 지하 암반 이백 미터쯤을 뚫고 나온 사람들 아니냐!
“먹을 것은?”
“햇반 하고 라면 사 왔어요. 김치가 없어요.”
그 말을 하고 쌩 가버렸다. 술에 취하지 않은 풀치에게 나는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나는 지희 조카가 사다 준 설렁탕 두 개, 햄, 김과 김치를 쇼핑백에 담았다. 나는 삼십 미터도 안 되는 풀치 집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단번에 알아봤다.
이 층 컨테이너 앞에 갓등이 달려있다. 세 칸으로 된 신발장에 풀치가 신고 있었던 뒤축이 닳아진 등산화가 놓여있다. 옆에는 이 층으로 올라가는 철재 계단이 있다. 그 아래 공간에는 풀치가 모아 놓은 종이박스가 비를 맞아 쳐진 채 뒤죽박죽 쌓여있었다. 풀치는 동네에서 박스를 주워 팔기도 했다. 고장 난 벽시계, 살이 부러져 홀라당 뒤집어진 검정 우산, 낡은 가방 안에 낚싯대, 주워 온 골프채가 계단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전 내 친구가 집에 왔을 때 드라이버 채를 들고 와 마당에서 휘두르면서 허세를 부리던 그 골프채였다. 재생 불가능하게 보인 것들이 야산처럼 쌓여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풀치 너도 재생하기는 진즉 종 쳤다.
“풀치야! 니가 살라고 하먼 당장 이것들부터 치워라” 나는 집에 없는 풀치에게 중얼거렸다. 풀치는 며칠 전 액자를 주워와서 나보고 한문을 읽어보라고 했었다. 행서로 갈겨썼지만 내가 다 읽을 수 있는 한자였다. 나는 감나무 아래 서 있는 성길씨 보란 듯이 자신 있게 한 방에 읽었다. ‘근디 왜 내가 성길 씨를 신경 쓰지?’ 했던 그 액자도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위태로워 보였다. 오르내리다가 마빡이 깨질 뻔도 했는데, 풀치는 붕대나 반창고를 감거나 붙이고 다니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술 마시고 자전거를 끌고 집 앞에 잘 받쳐놓은 술꾼들의 이치와 같지 않은가 싶다.
풀치를 부르다가 대답이 없어 계단 입구에 반찬은 두고 왔다.
말 많은 앞집 나팔수 아줌마가 보면 성길씨와 풀치와 나와 삼각관계니 뭐니 하겠지만, 삼각김밥이든 육각수든 내 맘대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