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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구석이 구석에 말을 걸면 밥이 된다 177

by 불량품들의 사계

구석이 구석 말을 면 밥이 된다



지난 연말이었다. 롯데마트 온풍기는 거세게 돌아갔다. 성길씨는 매장 안을 들러보지도 않고 TV 55인치 90만 원을 결재했다. 나는 그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야 했다.

“할부로 허세요”

“얼마 한다고.”

‘나 헌테는 전기세 십 원짜리도 받어가먼서.’

십 원짜리 한 푼 아껴 이럴 때 쓰는 거라고 나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마당에서 막대기로 이불을 털고 있었다. 성길씨가 수돗가에서 신발을 털며 말했다.

“TV가 까만 줄이 생겨요.”

“고쳐야죠.”

“오래돼서 새로 하나 장만 할라고요.”

“우리 집에 날씬허고 쇼캇트 한 동생 놀러오지라이?, 그 동생이 롯데 마트 다녀라이. 요새 티브이 얼마 헌 지 물어 볼께요.”

성길씨는 전화하는 동안 벌써 나갈 채비를 했다. 애경이는 TV 할인한다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뛰뛰빵빵 천호동 롯데마트로 달렸다.


애경이는 우리가 매장에 들어서자 TV 진열된 곳으로 안내했다. 그는 애경이가 권하는 TV를 맘에 들어했다. 그는 일시불로 한다고 했다. 애경이와 나는 할부로 해도 된다고 권했다.

성길씨는 집으로 오는 길에 밥을 사겠다고 했다. 성길씨는 한우 전문 집으로, 삼겹살집으로, 순댓국집으로 나를 뺑뺑이 돌렸다. 몇 바퀴를 돌렸다. ‘내가 지 운전사도 아니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동생들이 연말이라고 나오라고 해도 나가지 않았었다.

“아저씨, 그냥 싼 데서 먹어요.”

“그럴까요?”

그는 어버이날 노모 모시고 간 적 있는 한우 전문점으로 갔다. ‘짠돌씨가 오늘 뭔 일일까.’

식당은 가족들로 꽉 찼다. 우리는 서서 기다렸다. 성길씨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때 자리가 났다. 그는 삼겹실 이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럼, 그렇지.’

성길씨 마음이 짐작 갔다. 본인도 한우를 먹고 싶지만, 티브이 사서 돈을 아껴야 했다. 그렇지만 ‘내차 기름값, 내 시간은 아깝지 않냐고, 애경에게 돈 있다고 자랑헐라고 일시불로 끊더니.’

밑반찬이 테이블에 차려졌다. 샐러드를 입속에 넣으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자리 좀 바꾸게요.”

“왜요?”

“뒤에 아는 사람 있어요.”

나는 젓가락을 들고 일어섰다. 성길씨는 재빨리 내 자리로 가서 앉고 말했다.

“우리 둘이 밥 먹은 것 보면 소문날까 봐요.”

나는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돌아봤다. 테이블 두 개 지나 아줌마랑 눈이 마주쳤다. 그 아줌마는 나를 보며 웃을까 말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 눈을 뻔히 쳐다 본지 몰라!’

그 아줌마는 웃으려다 입꼬리가 내려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삼겹살을 불판에 올리고 있는 성길씨에게 말했다.

“어떻게 아는디요?”

“계곡 근처에 사는 흰머리 남자 있잖아요. 그 부부예요.”

“강아지 럭키네 집 말이에요? 그럼 나도 아는디 인사헐 걸.”

나는 아는 척을 하려고 일어섰다. 그들은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계산대까지 가서 인사를 할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말했다.

“아저씨! 나 성질나네. 연말이라 혼자 사는 이웃끼리 밥 먹으러 왔는갑다 허겠지요. 글고 우리가 불륜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해도 처녀총각인디, 끄덕허면 누가 보면 어떡허냐 걱정허고 앞으로는 밖에서 나랑 밥 먹을 생각일랑 허지도 마쇼!”

“그으으게 아아니고.”

“내가 눈치를 안 본디, 왜 아저씨가 눈치를 봐쌌소?. 봐도 아가씨인 내가 봐야재.”

“아아 도동네가 마알이 마안서.”

“아까 동생들이 밥 먹으러 나오라고 통화한 소리 들었지요? 아저씨, 집에 델다 줄라고 동생들 뿌리치고 온 것인디. 진짜 기분 드럽네.”

“그으게 아아아니라.”

“안이나 바깥이나, 나도 아저씨랑 밥 먹는 것 좋아서 먹은 줄 아요?’

“아아무 사이이도 아아이인데 소오문 나알까봐아.”

‘그래, 평생 너 혼자 살어라! 누가 이런 시골구석에 시집오냐. 차도 없지, 돈도 없지, 나이 들었지, 노모와 살지, 니가 여자라먼 그런 남자허고 결혼허겠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젊고 이쁜 여자만 찾고, 앞으로 콧물도 없을 텐 게. ’

나는 소주를 한잔 따르려다 내려놓았다.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불판에 고기를 뒤집었다. 그가 막잔을 드는 순간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들어오는 차 안 공기는 바깥 날씨만큼 차가웠다. 결국, 세입자인 내가 어색한 공기를 깼다.

“아따, 고기 맛있습디다. 나도 차 만 없었으먼 소주 한잔 했을 텐디.”

“그러게요. 나만 혼자 마셔 미안했어요.”


이틀 뒤였다. 마당에서 풀치가 키운 개 두 마리가 놀러 왔다. 개들에게 사료를 주고 있었다. 눈치 없는 성길씨가 말했다.

“일 나가면 시장 가기 힘드니까 장 보러 가게요.”

‘......’

마당에 부는 바람끝이 송곳 같았다. 그렇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집주인이다. 뚱해 있어 봤자 성길씨가 내 기분 알아줄 턱 없었다.


시동을 걸어 하나로 마트에 갔다. 계란과 물을 샀다. 그는 장을 본 후, 순댓국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엊그제 일이 생각났다.

“또 몇바쿠 돌 거에요?”

성길씨는 어리둥절했다.

“티브이 사러갔다온 날처럼 내차 돌고 돌릴 거냐고요.”

“아하.”

그는 웃으며 순댓국집 근처 추어탕 집에 차를 세우라고 했다.

‘뭐를 한 번에 결정을 못 해.’

성길씨는 갑자기 전화를 들었다.

“술고래도 부르게요.”

“어서 부르쑈.”

성길씨가 술고래 부르자는 말에 나는 기분이 활짝 풀렸다.

풀치는 술 마시고 뻗어 전화를 못 받았다. 나 있다고 했으면 총알처럼 달려왔을 텐데.

오늘 아침 레옹 모자를 쓴 성길씨 와 마당에서 마주쳤다. 티브이가 커서 볼만하다고 그가 말했다. 티브이 사러 가던 날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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