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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기억보다 냄새 193

by 불량품들의 사계

기억보다 냄새



한 달에 한 번, 황반변성에 걸려 눈에 주사를 맞는다. 의사께서 앞으로 한 달 반에 보자고 했다.


석촌호수로 핸들을 돌렸다. 초록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벤치에 앉아 물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림자가 눈 안에서 출렁거린다. 바람이 뒤통수를 치고 갔다. 벚꽃은 언제 다 졌을까. 개들이 물고 갔을까. 꽃을 놓치고 만 이유가 있다.


사월, LH에서 전화가 왔다. 집을 나가라는 날짜를 못 박았다. 안 나가면 소송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 입술이 부르트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송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나무가 뿌리째 뽑힐 것이고, 버려진 개, 고양이들은 누가 밥을 줄 것이며, 무엇보다 강렬한 마을의 냄새다.

마당 귀퉁이에서 마르던 빨래 냄새, 초여름 소나기를 맞으며 뒤척이던 풀과 나뭇잎 냄새, 땅이 파일 때 나는 냄새는 어디에 살아도 고향을 잊지 못하듯 기억보다 강할 것이다.

뒤 목이 써늘하다. 석촌호수 근처에서 살 때 강아지 솔이와 산이랑 산책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제 그들은 내 곁에 없다. 더는 이어질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맞은 표현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팔을 벌려도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물가에 손을 내밀다 말고 속으로 청승맞게 노래를 불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눈꺼풀이 떨렸다. 강물이 부풀어 올랐다. 배가 고팠다. 일을 그만두고 밥을 사 먹은 적이 별로 없다. 생활비를 절약해야겠다고 일차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나라에 충성은 아니지만. 그 맹세를 훌륭하게 잘 지키고 있다. 이제는 집밥이 정말 좋아졌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바람이 찼다.

집으로 가는 길, 배가 고파서인지 군데군데 가로등이 꺼져 있어서인지 차가 방지턱에서 유난히 덜컹거렸다.

라디오를 켜고 노래를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순둥이와 꽃님이가 차 소리를 듣고 호두나무를 타고 뛰어 내려왔다. 사료를 밥그릇에 듬뿍 담아주었다.

코로나도 걸리지 않았었는데 코감기가 걸렸다. 노란 코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패딩 잠바로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봄이여, 뭐여’ 춥고 어둡다.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스트레칭을 했다. 고개를 까닥거리며 별을 쳐다보았다. 배를 내밀고 발밑에서 뒹굴던 순둥이가 벌떡 일어났다. 활처럼 휘었다. 밭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순식간에 참새를 낚아챘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졌다.

‘지금 시간이 맷 시인데 집에 안 가고 잽혔냐. 참새, 너도 나처럼 눈이 안 좋냐?’

순둥이에게 다가가 물고 있는 참새를 입에서 빼었다. 순둥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텃밭 가장자리에 호미로 흙을 팠다. 풀을 깔고 참새를 묻었다. 순둥이를 잡아끌고 왔다. 흙무덤 앞에 앉혔다. 순둥이는 어리둥절하다가 도망갔다.

밤바람이 고양이 발소리보다 잘게 불어온다. 찰나에 지워진 참새가 앉았던 곳을 바라보다가 마당 끝에 섰다.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벌렸다. 소리 죽여 노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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