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불 194
그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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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치는 밤이면 플래시를 켜고 돌아다닌다. 풀치는 이사 간 곳에서도 매일 술주정했다. 주인과 주민 신고로 쫓겨나 돌아왔다. 그는 전기를 살리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컨테이너 땅 주인한테 사는 동안 월세를 내겠다고 했는데도 거절당했다.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술이다. 또 얼마나 술 마시고 마을을 휘젓고 다닐까.
나는 밭 가운데 서 있는 아로니아 나무를 보고 있었다. 풀치는 퀭한 눈으로 마당을 향해 내려왔다. 그는 소리 죽여 말했다.
“땅 주인이 집 뒤에다 가묘를 썼대요.”
“아침부터 그게 무슨 말이여?”
나는 아로니아 꽃잎을 세다 말고 말했다.
풀치는 자세를 낮추며 평상에 앉았다.
“묘 옮긴다면서 LH에서 돈 받으려고 그랬겠죠.”
풀치는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다시 말을 꺼냈다.
“자기 집 마당 뒤에 폐기물도 다 묻었다니까요.”
“아따, 꽃들이 들을까 무섭다야. 추측으로 하는 말은 삼가해라이.”
길가에 산 밑에 구석진 곳에 던져놓은 쓰레기들이 쌓이고 쌓였다. 개천에도 쓰레기들이 떠다닌다. 오늘 쓰레기를 땅에 묻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LH에서 쓰레기를 치워야 주거 이전비를 준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고향을 어떻게 돈으로 사고팔고 하겠냐만, 주민들이 이해는 됐다. 나야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라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을이 쓰레기장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냉동실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한 푼이라도 덜 주려는 자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결과물이 쓰레기다.
“뒷집 아저씨가 주소와 전기를 살리지 못하게 하면 비밀을 말하겠다고 하라고 했어요.”
뒷집 아저씨는 한밤중 달빛을 받으며 쇠스랑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다. 한밤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여러 번 놀랐다. 부지런이 과한 이 사람은 성길 씨가 호두 따다 자기 집 담 위에 올려놓은 기왓장 깼다고 난리를 쳤던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소랑 전기 살려라.”
“누님, 나는 그런 더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따, 그럼 뭐 하러 말 허냐. 그리고 니가 땅 주인이 가묘 썼다고 나한테 말헌 것은 깨끗허냐.”
“그것 하고 다르잖아요. 누님, 집에다 십만 원 내고 전기 딸게요.”
“다르기는 뭐가 달라. 글고 주인 선에서 따야재. 내 선에서 따면 복잡한 일 생겨야.”
“이 집 계량기 몇 개예요?”
“세 개인디, 이사 간 뒷방 할매 것은 죽었지.”
“그러니까, 누님에게 십만 원 주는 게 낫지. 누님 전기요금 나오면 보태서 내세요.”
“그렇드라도 집주인 성길씨한테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해야 된당께.”
그의 뜻은 단 얼마라도 나에게 보태 주고 싶은 눈치였다. 미라 같던 풀치는 무전취식으로 구치소 갔다 왔다. 배에 살이 붙었다. 그의 맘을 알고 나니 배도 귀여워 찰싹 때릴 뻔했다.
하지만, 풀치의 주정이 언제 도질 줄 모르는데, 돈을 안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나한테 십만 원 주고 전기선 땄다는 말을 술김에라도 한다 쳐, 내가 뭐가 될 것인가. ‘연민은 연민이고, 선을 잘 그서야 돼, 선을 구분 못 해 내 꼬라지가 이 모양이 됐는디’ 십만 원이라는 말에 흔들리려 했던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뒷방 할매가 이 집에서 살 때다. 할매는 기름을 아껴 쓰다 보일러가 터졌다. 성길씨 말로는 할매 숨겨놓은 돈이 있다고 했다.
“기름도 적당히 아껴야지, 보일러가 얼어 터진 게 벌써 두 번째이에요. 더는 고쳐 줄 수 없어요.”
성길씨는 손들었다고 했다.
할매는 동사무소에서 지원해 준 석유를 나하고 성길씨에게 사라고 했다. 현금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뒷방은 얇은 옷 하나 걸치고 폭설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할매 집안에 화장실도 없다. 겨울에도 텃밭에 있는 이동식 화장실을 써야 한다. 그게 맘에 걸렸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내 맘이 편해지고 싶었다. 현금으로 난로를 사면 되겠다 싶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그때는 석유 한 말에 이만 이 천 원이었다. 두 말에 삼만 오천 원 원 주고 샀다. 성길씨는 네 말을 샀다. 성길씨 석유통이 훨씬 컸다.
성길씨가 말했다. “앞집 아줌마가 나팔수라 석유통을 저녁에 가져갑시다” 앞집 아줌마는 옥상에 올라가 마을을 훑어보고 소문을 낸다고 말했다. 성길씨는 나팔수한테 들키면 큰일 난다고 했다. 해 떨어지면 가져오기로 했다.
일이 이런데 전기선을 따 쓰다가 들키면 내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애초에 시작도 말아야지. 한 가지 더, 전기선을 따 준 순간 풀치가 개구신처럼 나를 괴롭혀도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풀치는 평상에 일어나 말했다.
“누님, 이제 술 끊을게요.”
나는 상추를 솎으러 밭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서 살았으면 샤워도 하고 좋았을 텐디. 옥탑에서 내려가다 떨어진 적은 없었냐?”
그는 계단에서 계곡에서 떨어져도 여태 긁히거나 깨지거나 부러진 적 없다. 술의 전설이다
나는 오래전 술 마시고 계단에서 내려가다 굴러 귀 뒤가 찢어져 꿰맸다. 그때 붕대로 귀를 감고 다녔을 때 “아따 귀걸이 겁나게 큰 거 했다”라고 친구들이 놀렸었다. 아직도 속살이 튀어나와 있다.
풀치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했다.
“자진해서 곧 구치소 들어갈 거예요. 구치소에서 일해 일당 10만 원씩 벌금 삭제하고 나올 거예요”
구치소 들어가면 전기세가 안 나올 거라는 말이었다.
“나 불 싫어 헌다. 글고 그런 말 할러먼 얼른 가라.”
“불이 뭔 말이에요?”
“불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