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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저물녘 트라이앵글 195

by 불량품들의 사계

저물녘 트라이앵글



“연자방아 아래 살구나무 화분에 옮겨 심어요.” 출입구 가림막으로 활용하라고 마당에 서서 성길씨가 말했다.

이사 온 해 봄, 그가 높이 30m만 한 살구나무를 밭에서 뽑아 버렸다. 나는 살구나무를 주워 연자방아래 심었다.

“가림막 역할도 역할이지만 LH에서 지장물조사 나오면 살구나무도 십만 원은 쳐 주니까, 남의 땅에 있는 것은 쳐주지 않아요.”

“보상은 무슨. 그냥 둘라요.”

살구나무가 자라고 있는 땅은 그의 땅이 아니었다. 나와 성길씨는 지장물조사를 다시 받기로 했다.

신도시 개발로 인한 수용과 보상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보이는 갖가지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때가 많았다. 그 대열에 나도 돌 하나를 슬쩍 올리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성길씨는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가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풀을 뽑아도, 루꼴라를 따다가도, 고양이와 개들과 놀아도 십만 원이라는 말이 귀가를 맴돌았다.

막상 살구나무를 옮기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은 지가 언제인데 뿌리가 사방으로 뻗었을 것 같았다. 망설임도 잠시, 이리 이사 왔을 때 몇백을 들여 집을 고쳤는데.

“술고래한테 옮겨 심어 달라고 해야 쓰겄네. 근디 술고래가 힘이 있으까.”

평상에 앉아있는 풀치를 보고 중얼거렸다. 성길씨는 망설임 없이 창고에서 삽을 가져왔다. 흙을 파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니 성길씨의 어깨 아래 이두박근이 탱탱해졌다. 그러나 뿌리는 돌 틈에 깊숙이 박혀 뽑혀 나오지 않았다. 농사로 단련된 성길씨의 힘으로도 어림없었다.

풀치는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었다. 남의 일은 남의 일이지만. 술 안 마시면 마당에 내놓은 쓰레기도 주워가 태워 주는데, 오늘은 왜 저리 앉아만 있는지. ‘술 마시라면 번개처럼 마셔겄지.’

나는 손으로 돌을 긁어냈다. 성길씨는 어떻게든 힘으로 해결하려 했다. 삽을 던지고 손을 바들바들 떨며 뿌리를 잡아당겼다. 뽑혔다. 뿌리가 갈라져 버렸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서로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분을 가져와 일단 심었다. 잠시 후 성길씨가 사라졌다.

점심때가 지나 성길씨가 소나무를 들고 나타났다. 나와 성길씨가 소나무를 가지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동네에서 꼽꼽하기로 소문난 길 건너 노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아직 허리가 꼿꼿한 노인이 땅 부자에 백만장자라고 성길씨가 귀띔을 해줬다. 나와는 간혹 눈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다. 이 양반은 풀치가 사는 컨테이너 주인으로 전기세가 밀렸다고 풀치 전기를 끊은 사람이다.

성길씨는 소나무를 화분에 심으면서 노인에게 말했다.

“칡 캐러 갔다가 소나무 캐왔어요.”

“뭐, 딱 보니 이 여자 때문에 캐 왔구만.”

우리 집 입구에서 화분에 소나무를 심고 있으니 노인은 놀리듯이 빈정댔다.

“칡 캐러 갔었다니까요.”

“칡 캤어요?”

나도 눈치 없이 물었다.

“칡은 못 캤어요.”

“거봐, 이 여자 때문에 소나무 캐 왔구만.”

노인은 성길 씨를 내려다보며 ‘네 속을 내가 다 알고 있어’라는 눈빛으로 짓궂게 파고들었다.

성길씨는 벌떡 일어나 손짓으로 노인에게 마당 입구 쪽을 가르쳤다. 갈 길 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마음을 들킨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저러다 싸우는 것 아니여.’

나도 성길씨가 칡을 캐러 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칡이 있어야 하는데 소나무 뿌리를 감아 묶은 칡넝쿨만 있었다. 누가 봐도 소나무를 일부러 깨러 간 게 분명한데 성길씨는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애써 속마음을 숨겼다.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저러다가 소나무를 뽑아 버릴 것 같아서였다. 성길씨는 살구나무가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노인은 걸음을 옮기다가 마당 끝에 서서 말했다.

“가만 보니 보상받으려고 그런 거 같은데, 땅에 있어야 돈을 쳐주지. 화분은 차에 싣고 갈 수 있잖아.”

말을 끝내고 휘리릭 돌아서서 가버렸다.

노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성길씨 정보는 늘 맹탕이었으니까. 둘이 여태 이단 옆차기했다.

그렇지만 소나무 살구나무 수국은 파수꾼이 되어주었다. 누구나 지나다니는 마당이라 발이 쳐있었다. 답답했었다.

이 시점에 성길씨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할 게 있다.

이사 왔을 때 감나무 밑에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세트로 있었다. 그런데 날이 더워지면서 내가 출입문을 열어 놨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있는 성길씨 눈이랑 내 눈이랑 마주쳤다. 그는 의자와 테이블을 자기 집 마당 단풍나무 아래에 갖다 놓았다. 고양이도 우리 집에서 살다 보니 성길씨를 봐도 잘 따라가지 않는다. 마당도, 성길씨 쉼터도, 순둥이도 내가 점령해 버린 것 같아 미안하고 신경 쓰였었다.

풀치는 평상 한가운데 눌러앉아 다리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누님, 커피 한 잔 주세요”

“헌 게 뭐 있다고.”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알았어. 내 친구가 뉴욕에 산디, 얼마 전 알 커피를 보냈단께. 고걸로.”

“소나무 심어 줬으니까 나도 한 잔 주세요.”

“당연허죠.”

성길씨는 평상 끝과 연탄창고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디 가서라도 가지, 고추, 토마토, 모종 할 때 토토탄을 땅속에 먼저 뿌리세요.”

“예?”

내가 그렇게 모종 할 때 가르쳐 달라고 해도 비밀처럼 혼자 했었다. 오늘은 남은 비료를 가져다 옆에 뿌리라고 했다. 그 약이 뿌리를 벌레들이 갉아먹지 못하게 한다고 말해줬다.

그동안 아무리 밭을 들여다보고 물을 주고 했지만, 가지 오이 토마토가 매년 빼빼 말랐었다. 성길씨 밭에 토마토는 권투선수 주먹만 했고, 가지, 오이는 헬스클럽 코치 어깨만 했던 기밀을 말해주었다.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자 저물 무렵 손이며 귀가 순해져 갔다.

해가 산봉우리에 가까워졌다. 풀치는 얼굴이며 팔이며 새카맣다. 깃이 말아 올려진 모자를 쓰고 외국 브랜드 등산화를 신고 있다. 내가 등산화 멋있다고 말한 후 일 년 내내 등산화만 신고 다닌다. 등산복위에 잠바를 아직도 겹쳐 입고 있다.

성길씨는 회색인지 남색인지 모를 무릎이 늘어진 바지를 입고 앉아있다.

나는 페인트가 묻은 세 줄짜리 츄리닝을 입고 출입문 옆 평상 끝에 앉았다. 연자방아 아래 감나무에서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가 흘러나왔다. 풀치가 블루투스를 켜놓았다.

나무 그림자들이 머리 위를 지나 벽에 가닿았다. 희미한 그림자 셋. 콧속이 시큰했다.

그 옛날 전봇대에 붙어 빗물에 흘러내린 영화 포스터 같았다. 아련한 봄날 주인공이었다.

바람이 가지런히 불어온다. 세상 무엇이 그들을 흔든다 해도 이 계절 손을 잡고 놓치고 싶지 않다.

언제 술 마시고 떠들다 구치소 갈지 모르는 풀치, 성길씨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에 가슴이 아릿해져 이들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감정을 주체 못 했다.

“다음 주에 닭 사다 백숙 끓일라요.”

나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말했다.

“아니요. 내가 토종닭 살께요.”

“그럼 같이 가서 돈은 내가 낼라요.”

앞니가 없는 풀치가 햇살을 받으며 말했다.

“토종닭이 맛있지.”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서로에게 마음 쓰는 것이 봄날 새순처럼 부드러워졌다. 산을 쳐다보는 그들 눈에 애잔함이 묻어있었다. 해가 산봉우리에 걸치자 셋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빈 일회용 컵을 구겨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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