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속에 너를 닮은 술이 산다196
내 맘 속에 너를 닮은 술이 산다
여자 셋이 마천동 중앙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나왔다. 맞은편에 치킨집이 보였다. 헤어지기 섭섭해 내가 먼저 “치킨에 생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에미애비 몰라보는 낮술을 끊은 지 오래다. 하지만 356일 넘게 술을 마시는 심이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복이 넘쳐흐른다. 술은 못하게 생겼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옆에 앉은 심이에게 말했다.
“심, 술 한잔 해야지?”
“술 끊었어.”
“무슨 소리여, 주류회사 망헌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경옥이가 말했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않고 말이 없다.
“언니, 심이 그럴 일이 있어.”
경옥이는 웃음을 머금고 얼굴을 내밀며 속삭였다.
나는 놀랐다. 해가 우리를 보고 있어 그런 것도 아니고. 술만큼은 절대 양보를 하지 않은 심이다.
심이는 두주불사다. 공치는 사람이 공 안 맞는 이유를 수십 가지 말하듯 그녀의 술 마시는 이유는 다양하다. 바람 불어서 바람 그쳐서, 새 신발을 신어서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술을 마신다.
점심때부터 마시기 시작해 저녁때 집에 가서 남편 밥 차려주고 다시 나온다. 하루에 두 번 마시는 것으로 치면 일 년에 3백90일 마신다. 그녀의 집 베란다에 소주 상자가 쌓여있다. 이태백도 그녀를 따를 수 없다.
그녀는 데킬라, 보드카, 바카디를 끊어 마시지 않는다. 그녀는 털어 넣은 술을 꿀떡 삼킨다. 한칼에 베어버린다. 목젖이 움직인다. 안주는 꼭 먹는다. 술을 정말 맛있게 마셔 술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도 마시고 만다.
나도 항상 집에 일찍 들어가리라 생각하지만, 심이와 술자리를 하면 물도 술이 된다. ‘따르고 따르리, 두둥실 흘러가는 저 구름도 저 바람도 잔에 채우리’ 그녀가 찰랑찰랑 하염없이 술잔을 채우는데 어떻게 취하지 않겠는가. 여지없이 밤은 무너지고 코끝에 새벽은 와 있다.
그녀는 밤을 새우며 마셔도 걸음걸이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끝까지 꼿꼿하게 앉아있다. 끝없이 술이 들어가는 그녀의 배는 으음. 배 나왔다는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심, 미만.
그녀는 “써야 내 돈, 오늘은 내가 쏠게” 외치며 계산대로 달린다.
그녀는 술자리가 파할 때쯤 하는 말이 있다. “집에 갈 거야?”라고 묻고 묻는다. 라이브에 가자는 뜻이다. 언제나 라이브로 마무리한다. 그녀는 노래를 잘한다. 송파나 강동구 라이브는 노래 세 곡에 만원이다.
심이는 우리가 부르고 마신 것은 우리 돈으로 깔끔하게 계산한다. 그녀의 귀가 시간은 밤 세시. 기본이다.
어느 날 그녀와 그녀 지인 둘이 술에 취해 라이브를 갔다. 얼마나 취했으면 라이브 사장님께서 집에가라고 쫓아냈다.
그녀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손에 핸드폰을 놓지 않는다. 남편이 전화하면 “집에 가는 중이야” 마이크를 던지고 택시를 부른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늦어지면 하는 모습 아닌가.
하루는 여자 여섯 명이 방이동 횟집에서 12시에 모였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수다를 떨다가 홍어집으로 갔다. 4차는 그녀의 단골집 라이브에 갔는데 문을 아직 안 열었다. 근처 라이브에서 노래 부르다가 단골 라이브로 자리를 옮겼다.
심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새벽까지 달렸다. 세시가 넘자 나는 의자에 뻗었다. 심이와 그녀들은 홀에 나가 이 박 삼일 노래하고 춤 칠 기세였다. 일행들이 노래를 좋아한다(나도)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술을 마실 때는 왜 그리 시간이 잘 가는지, 그날 심이네 집 문 잠겨있었다.
술도 부지런해야 마신다. 언제 청소를 하는지. 그녀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도 마루며 화장실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녀는 음식을 만들면 사방팔방 돌린다. 지인들 다 불러 먹인다. 우리의 일방적 아지트다. 나도 시내 나가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무조건 심이 네로 간다. 냉장고 안에 먹을게 가득 차 있다. 날마다 술을 마시는데 언제 음식은 만들어 놓는지. 손이 날렵해 반찬도 뚝딱 만든다. 철마다 꽃게 갑오징어 민어 곰치 생굴로 술상을 본다.
노래 잘하고 패션 감각도 뛰어나고 공 잘 치고 술통 크고 주변 잘 살피며 못 하는 게 없는 그녀. 운전은 못 한다. 하기야 운전했으면 대리운전비 감당했겠어.
주말마다 남편 친구들이 그녀의 집에 방문한다. 그녀는 제철 음식을 공수해 그들을 먹이고 재운다. 방방곡곡 남편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이 운전한다고 술을 안 마시면 강원도 구석에서도 대리운전해 버린다.
이런 그녀라, “술 한잔 할래” 하면 눈이 반짝거리며 목젖이 떨어야 하는데 술을 안 마신다고 해 나는 놀랄 수밖에.
“심, 왜 그래?”
“언니, 나 진짜 주독 걸렸어.”
맞은편 경옥이가 주위를 살피며 은밀히 말했다.
“쟤, 주독 맞아.”
“무슨 소리여.”
“언니, 내 코 봐봐.”
심이는 얼굴을 돌리며 코를 내밀었다.
“공쳐서 탔구만 뭐.”
“언니, 코 옆에 뭐 났잖아.”
“그거는 뭐가 난 거고.”
경옥이는 킥킥 웃었다.
“살다 살다 여자가 주독 걸렸다는 말 처음 들었고, 나는 엄마 젖 대신 막걸리병 물고 살았는디도 코 삘개진 적 없었다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원장님에게 가자. 주독인지 물어보게.”
“아까 말하려다 창피해서. 네이버에서 찾아봤어.”
나는 주독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주변에 코 빨간 사람 없다.
심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치킨 다 먹고 가게.”
심이는 아쉬운 눈빛을 발사했다.
나는 한의원 문을 열었다. 경옥이는 웃으며 따라왔다.
“원장님, 심이 코 왜 이리 삘개요?”
“음, 주사비네요.”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주사아 뭐라고요?”
“주사비입니다.”
나는 주사비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요?”
“술을 끊어야죠.”
“아이고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네. 이 동생 하루에 술 한 말 마시는데.”
경옥이는 웃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당분간 참아야지.”
심이는 술 끊겠다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나는 병원 문을 나오면서 단체 카톡에 올렸다.
“느그들아, 점심이 주독 걸렸다네.”
폭죽이 팡팡 떠졌다.
며칠 지나 심이네 집에 갔다. 그녀는 어제도 마셨단다. 점심 이가 주독 걸렸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점심이는 글을 쓰면 이민 간다고 하였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그녀 코에 휴대폰을 들이댔다. “안돼, 안돼”하면서 그녀는 코를 내밀었다.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듯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는 그녀는 아파트관리비와 대출이자로 주변 사람들 맛있는 거 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며칠 있다가 갑오징어 사 우리 집에 온다고 했다. 평상에 앉아 상추 따 소주 마시자고 했다.
나, 죽은 척할까.
그녀의 본명은 점심이다. 점심 먹고 한잔, 간식 먹고 두 잔 놀려도 화 한번 내지 않은 그녀.
심아, 내 맘속에도 너와 닳은 술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