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량품들의 사계

밤마다 불빛을 세며 걸었다204

by 불량품들의 사계

밤마다 불빛을 세며 걸었다



“나, 이사 가요.”

“언제요?”

이이달말에요. 여어집 보오즈금은 이이사아가고 나아서 주울게에요.”

“그게 뭔 소리다요. 알아먹게 말해봐요.”

전화기 넘어 성길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나는 동태탕 국물을 뜨다가 수저를 던졌다. 동태탕 국물에 입천장을 델뻔했다.

집에 놀러 온 동생들과 마을 입구 저수지 근처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더워죽겄는디 먼 동태탕이여’ 점심 사주러 온 동생들에게 신경질을 내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 천만 원 보증금도 문제지만, 마을주민들이 거의 떠나 터라 마당에 쑥갓, 해바라기가 꽃을 피웠어도 밤에는 목덜미가 서늘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풀치는 술에 취해 단풍나무아래서 널브러져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또 빙들하고 있었구만. 잘 헌 더 잘해.’

“그으러엏게 대앴어요.”

“나보다 이사 가지 말고 오래 살자고 해놓고.”

“도옹새앵드리 무우조오건 이이사 가아라고 해에서.”

동생들 성화에 성길씨는 서울에 사는 여동생 집으로 이사 간다고 말했었다. 동생들은 이사 갈 집에 에어컨을 달아주고 장판과 벽지를 새것으로 해주고 버스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텃밭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동생들은 성길씨가 변명을 못 하게 장치를 했다.

성길씨는 포위망이 좁혀오자 이사 가기 싫어 날마다 반취반성이 되어 여동생들과 전화로 싸웠다.

성길씨는 봄마다 심던 고추 토마토 가지를 올봄에 심지 않았다. 상추만 모종했다. ‘이사 가려고 맘먹었구나’ 나도 집을 알아보려 다녔었다.

어느 날이었다.

“이사 안 갈 때니까, 집 보러 다니지 말아요.”

“정말요?”

성길씨도 이사 가기 싫어 괴로웠는데 내가 들썩거리니 떠나기 싫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시집와 도시에서 산 적 없는 노모도 이사 가면 돌아가실 거라는 것을 성길씨도 알고 있었다. 아파트로 이주한 노인들이 아프든지 돌아가셨다는 것을 나도 성길씨도 소문으로 들었다. 그는 하루라도 이 집에서 할머니랑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도 성길씨가 도시 생활을 적응 못 하겠다고 했다.

성길씨는 자기가 떠나면 언젠가는 LH에서 집을 부수어버리겠지만, 내가 남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마당도 쓸고 풀도 뽑아 줄 거라고 생각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사 가겠다고 집 보러 다니자 마음이 바뀐 것이었다.

이래놓고 이사 간다고 전화로 통보하고 그것도 모자라 보증금도 못 주겠다고 하면 누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이사 가서 나중에 돈 주세요, 허겄냐고. 글고 이사 갈 집을 내가 알기를 해 뭐해, 성길씨가 전화 안 받으면 끝이지’ 내 성격에 찾으러 다니지 않고 포기해버릴 게 뻔한데.

며칠 동안 성길씨를 스쳐 다녔다.

성길씨 집 출입문에 ‘술 사절’ 종잇장이 땡볕 아래 붙여져 있었다. 궁금했다. 나는 눈으로 종이를 가리키며 할 수 없이 말을 살짝 붙였다.

“저것은?”

“수울주우정엉뱅이랑 수울 그으만 마아시이려어고 써어 부웉여여놔았어요.”

‘아따, 안 마시겄다’ 나는 웃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그사이 풀치가 와서 종이를 떼어버렸다.

성길씨는 술 안 마시겠다고 풀치를 마당에 발도 못 들여놓게 했다. 술 취한 풀치는 연자방아에 앉아 트로트를 틀어놓고 허공에 삿대질하고 있다.

성길씨는 수돗가 단풍나무 아래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막걸리 뚜껑을 땄다. 그림자가 문턱을 넘어 설 때까지 마셨다. 내가 마당에서 한심하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LH가 떠밀지 않아도 느그들 꼴 보기 싫어 어서 떠야쓰겄다.’

“나 이사 안 갈 테니 말하고 삽시다.”

성길씨는 마음이 차분해졌는지 말을 더듬지 않았다.

“우선, 동생들이 놔둘까.”

“내가 안가겠다는데.”

“자고 나면 또 없었던 일로 헐라먼서.”

“잠이 안 와 밤에 돌아다녔는데 몇 집 안 남았어요.”

성길씨가 중얼거렸다.

그도 밤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불 켜진 집을 세고 있었다.

캄캄한 모과나무집 빈 마당에 장판이 깔린 평상을 나는 손으로 만지다가 내려오곤 다.

많은 등불은 어디로 갔을까. 어떤 불빛은 죽었을 것이고 어떤 불빛은 깜박거리고 있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