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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품의 사계

어디에 있어도 빛은 찾아든다 203

by 불량품들의 사계

어디에 있어도 빛은 찾아든다



꽤 오래전이었다. 낮술을 마시고 집에서 자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차 한잔하자고 전화가 왔다. 석촌 호수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머리를 잘 만진다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내 뒤를 따라오면서 ‘미용실 어디 다녀요, 뭐 하는 분이세요’ 묻는 사람도 있다. 그날도 그런 줄 알았다.

오십 미터쯤 걸었을까. 친구가 나를 보고 킥킥거렸다.

“오른쪽 알이 없어.”

선글라스 테 안으로 친구 손가락이 난입했다.

“뭔 말이여?”

나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들여다보았다. 정말 오른쪽 알이 없었다. 어이없었지만, 푸하하 웃었다. 자다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눌러져 하필 오른쪽 알이 빠져나간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고 집에서부터 걸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간 것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네.”

또라이구나 했겄지.”

친구는 황반변성이 별것 아닌 줄 알았다가 눈의 심각성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그날 이후로 친구들은 병원에 같이 가줬다. 요즈음은 혼자 다닌다. 한두 번도 아니고.

황반변성 초기는 횡단보도가 구부러져 보이고 모든 직선이 휘어져 보인다. 심하면 내가 보고자 하는 사물 중심이 까맣게 보인다. 꽃도 나무도 개도 고양이도 구름도 네 얼굴도 새까맣다.

얼마 전 티브이 광고가 까맣게 보였다. 같은 눈 다른 곳이 또 발병하였다. 아바스틴 주사를 눈에 맞으면 눈 안쪽에서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닌 것 같다.

철제 침대에 눕는다. 간호사가 눈알에 소독약을 두세 번 뿌린다. 뿌리는 게 아니라 들이붓는다. 나도 모르게 발을 오므리며 숨을 들이마시다가 내뿜는다. 이때 천을 걷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집에 가고 싶다. 의사가 의자를 당기면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는다. 마취제를 눈에 떨어뜨린다. 어느 쪽 눈에 주사를 맞는지 묻는다.

대답이 끝나면 주사가 눈알에 들어온다. 악물이 서서히 퍼진다. 구름이 병실 안에 퍼진다. 나인지 구름인지 천장에 가 닿는다. 병실 안이 뭉개진다. 구름이 걷히는 동안 별별 일들이 다 떠오른다.

올봄 친구들이 집에 왔었다. 그중 한 친구가 눈 영양제를 가져왔다. 정말 고마웠다. 눈에 좋은 거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었다. 우연히 일 년 지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은 우연히 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날 왔던 친구 중 한 명과 통화를 하게 됐다. 이말 저말 끝에 친구가 말했다.

“유통기간 보고 먹어라.”

나는 수화기를 들고 케이스 옆에서 유통기간을 찾아보았다. 수화기에 대고 웃었다.

“어, 일 년이 지났네.”

그 친구는 정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기분이 묘했었다.

혹시 발병이 ‘유통기간 지난 영양제 때문에! 아닐 거야’ 하지만 나는 날짜 지난 영양제 먹어도 탈이 안 난다고 생각했을까. 영양제를 영업하는 친구가 모르고 가져올 리는 없고.

내가 번듯하게 살면 그걸 갖다 줬을까. 기분이 엿 같았다. 영양제 때문에 발병했다고 생각지는 말자. 발병하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도 옹졸하지만, 씁쓸했다. ‘내가 저헌테 술을 사달라고 했어, 옷을 사달라고 했어, 여행을 가자고 했어, 저 있는 집 나도 있고, 물론 집 꼬라지가 좀 거시기는 허지만, 있을 거 다 있는디.’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남은 좋은 것 주고 나는 모자란 것 먹으라고 했는데. 주고도 욕먹는다고.

구름이 사라졌다. 생각을 멈추고 철제 침대에서 내려왔다.

병원에서 나와 동공이 커진 채로 송파를 돌아다녔다. 숙이를 만났다. 하이 개그를 잘하는 동생이다. 문정동 나이키 매장에서 70 프로 세일 한다고 구경 가자고 했다.

나는 운동화 네 켤레를 샀다. ‘친구들에게 인심이나 써 불자’ 오늘 병원비와 신발을 확 긁어 통장 잔액이 천 원짜리 5장이었다. ‘잔고 저 까짓것’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 눈이 안 보이먼 먼 소용이여’ 신발을 싸들고 집에 왔다.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친구들은 카톡을 봤는데 대답이 없다. 내 맘에 든 것을 샀기 때문이다.

자려고 누웠는데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통장 잔액이 생각이 났다. ‘잔고가 힘인디,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

벌떡 일어났다. 영양제를 들고나갔다. 마당에 패대기쳤다.

한참 내려다보다가 영양제를 케이스에서 꺼내어 일일이 쓰레기봉투에 쑤셔 박았다. 영양제는 쓰레기로 변했다. ‘니가 뭔 죄냐, 그것을 갖다 준 손이 문제지.’

누가 뭘 주면 맘에 안 들어도 거절 못 하고 가져와 집에서 버리는 나도 문제였다.

어쩌면 궁핍할수록 정직과 신용이 바탕이어야 하기에 가진 없이 사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는 병적일 만큼 받으면 갚으려 노력했지만, 알게 모르게 친구나 동생들에게 심적으로 부담을 줬을 수도 있다. 손 안 대고 코 풀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어디를 가도 빛은 찾아든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내가 멋있다고 했다.

‘아니여! 나도 잔고 많은 통장 겁나게 좋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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