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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대포항은 눈을 감지 않은가 봐 207

by 불량품들의 사계

대포항은 눈을 감지 않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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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뛰빵빵 고고, 나는 한계령과 대포항 추억을 이야기하며 불을 지폈다. 차는 흥분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오늘 집에 늦게 들어갈 거라고 집에 전화하는 사람 없었다.

개나 사람이나 일단 콧구멍에 바람을 쐐줘야 숨통이 트인다. 주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식구들 반찬을 해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 끝없는 반복과 반복을 단순한 일상의 관성쯤으로 치부하기 쉽다.

남편 흉을 보던 그녀들은 새끼들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자기들 맘을 알아주지 않고 혼자 알아서 큰 줄 안다느니, 새끼들에 대한 무조건의 사랑이 공짜인 줄 안다느니, 가까운 것들에 대한 사랑이란 때론 증오를 동반하는 것이라느니, 이야기가 점입가경이었다.

그렇다. 사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모호한 어떤 덩어리로 우리를 뒤덮고 있을 때가 많다. 마치 투명한 랩에 쌓아두는 음식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찌 숨구멍을 원하지 않겠는가.

햇빛은 나무이파리를 간지럽히고 그녀들은 새처럼 재잘거렸다. 제주도로 외국으로 공치러 날아다니는 전업주부인 진녀, 아직도 별명이 탤런트인 영아, 인천에서 온 개업전문가 인순이가 남한산성 산 밑 토박이식당에서 초복을 핑계 삼아 모였다.

오리 백숙 팔팔 끓는 그릇 뒤로 계곡 물소리가 귀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티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바다가 떠올랐다. 기억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어서 중년을 넘어선 친구들 얼굴에 바닷가 어린 시절이 그려졌다.

나는 오리 다리를 후후 불다가 바람을 잡았다.

“맘도 싱숭생숭 헌디 멀리 날라볼까?”

밥을 먹던 얼굴들이 생기가 돌았다.

“강원도 대포항 어때.

그녀들은 숟가락을 놓았다.

인순이 차 트렁크에는 밥, 반찬, 수박, 참외, 가스버너, 돗자리, 등산용 의자 그야말로 한 살림 있었다. 그녀는 저녁까지 놀다 가려고 맘먹고 왔단다.

휴가철이라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팔당댐까지 순탄하게 달릴 수 있었다. 팔당댐에 올라서자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럴 땐 구 길이 좋다. 하남에서 팔당댐을 타고 올라가 우회전으로 빠지는 길은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영락없이 밀린다. 이럴 때 나는 팔당대교를 끝까지 달려 양평이라고 이정표가 나오면 우회전한다. 계속 달려 자전거 이용소쯤에서 합류하는 길이 나온다. 그러면 정체 구간을 피할 수 있다.

나는 길치 중에서도 상 길치다. 내가 헤맨 거리를 다 합하면 지구 몇 바퀴는 돌지 않았을까. 나는 남보다 몇 년 더디게 살아가는 이유를 내 치유 불가능한 방향치에 두고 있다. 그러면 어때! 너 나 나나 다 같이 언젠가는 같은 지점에 도착해 있을 텐데.

어쨌든 지독한 길치인 내가 오늘은 한 건 했다.

“네가 이런 샛길을 알 정도면 얼마나 비싼 기름을 땅바닥에 뿌리고 다녔는지 알겄다.”

옆에 앉은 영아가 한마디 했다.

“이런 길도 알고 있다니. 너도 계획이 다 있었구나!”

앞자리에서 진여가 기특하다며 놀렸다.

차는 그야말로 방방 날았다. '이런 일탈의 속도는 암도 못 말리는 법이지' 차 안에는 광기가 넘쳤다. 속도 탓 인지 흘러가는 풍경들이 몽롱하다. 하늘의 구름은 수십 가지 모양으로 변했다. 영아와 진여는 선글라스에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인순이는 청바지에 티로 멋을 냈다. 나이가 들어도 계집애들은 계집애들이었다. 누구 시였더라, ‘아, 한 때 푸르게 빛나지 않던 하늘이 어디 있던가!’

얼마나 밟았을까. '배 안 고프냐?' 그녀들은 허기가 지는지 먹을 것을 찾았다. 나는 좋은 곳에서 먹자며 참으라고 했다.

강원도 한계 2리 재내 마을 입구에 마치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정자가 하나 서 있었다. 차에서 쏟아지듯 내린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버너에 불 켜고, 돼지 고추장 주물럭 볶고, 수박 자르고, 참외 깎고, 밥 푸고, 반찬 깔고 둘러앉았다. 프로들답게 순식간에 음식상이 차려졌다.

나는 정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노란 줄무늬 고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며 '나비, 안녕!' 손을 흔들었다.

“밥부터 먹고 놀아야.”

그녀들은 한소리 했다.

요새 정형외과 단골이 된 진여가 말했다.

“허리 아픈데 다 나아부렀어야.”

“근데 주부가 이렇게 나와 있으면 집에서 우리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

아들 둘이 있는 영아가 말했다.

“아이고 통화 안 하는 게 속 편한 줄 알아라.

애가 셋인 인순이가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남편과 아이들이 일찍 들어와 밥 달라고 하면 어쩔 뻔했냐며 다들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자들처럼 웃어젖혔다.

“얼른 가자. 해 지겄다.”

나는 그녀들에게 초를 쳤다. 그 소리가 무섭게 돗자리를 걷고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차에 실었다.

푸르고 푸른 길도 뻥 뚫려 우리의 강원도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계령 휴게실 못 미쳐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팔방이 어두워졌다. 나는 앞이 안 보이자 친구들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다.

갑자기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전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산을 타는 즐거움을 막 알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말마다 서울에서 가까운 청계산을 친구들과 함께 올랐다. 각자 먹을 것을 가져와 도시락과 막걸리 한 잔씩 하는 것은 가외의 즐거움이었다.

고향인 신안 지도에서 시킨 병어를 배낭에 넣어가 나는 작은 휴대용 도마와 칼로 능숙하게 회를 떴다. 산에서 싱싱한 바닷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해 보라.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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