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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대포항은 눈을 감지 않은가 봐 208

by 불량품들의 사계

대포항은 눈을 감지 않는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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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날다람쥐라는 별명을 가진 고향 친구 춘심이랑 둘이 산에 갔다. 우리는 주말마다 반복되던 산행이었던 만큼 늘 다니던 산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은 언제나 그 ‘순탄함’ 곁에 숨어 있었다.

상추쌈에 갈치속젓을 넣어 점심을 먹고 산에서 내려가는데 갑자기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동시에 몰아쳤다. 산에서 만나는 천둥소리는 그 공명이 수십 배는 큰 것 같았다. 번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둥소리는 온 산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낮인데도 양동이로 퍼붓는 굵은 빗줄기 속의 산길은 얼마나 캄캄하던지.

춘심이는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 나에게 주고 저는 돗자리를 펴 머리 위에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둘이 만나면 언제나 아옹다옹해서 친구들이 우리 둘을 ‘톰과 제리’라고 했는데 막상 궁지에 몰리니 나부터 챙기는 친구가 든든했다.

나는 천둥과 번개 대신 감동 맞았다. ‘앞으로 날다람쥐에게 잡혀줘야지’ 그러나 세 발자국 걸었을까, 바람이 얼마나 사납게 부는지 우산이 홀라당 뒤집혀 버렸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았다. 오솔길에 풀이 웃자란 것으로 봐서 인적이 드문 길 같았다. 당황했지만 서로 눈만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나는 아래로 내려간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침착하던 춘심이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짙게 깔려있었다. ‘너마저’ 우리는 삼십 분 넘게 어두운 산속을 헤맸다. 나무이파리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천둥 번개를 피해 숨을 곳을 찾아야 했지만, 어디선가 삽만 한 손이 나타나 목덜미를 들고 우리를 끌고 갈 것 같았다. 음산한 느낌이 숲에 가득했다.

옷은 젖어 몸에 달라붙고 머리카락에선 빗방울이 줄줄 흘러내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공포를 느낄 때는 말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무서울 것 없이 산을 오르내리던 날다람쥐는 말없이 앞서 어두운 산길을 헤쳐 나갔다. ‘여기서 넘어져 다치먼 종 친다.’ 나는 나뭇가지를 잡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며 날다람쥐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아득하기만 할 때쯤 아래쪽에서 파란색 판초를 입은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 빗속에 사람이 설마, 청계산에 곰이 있을 턱도 없고’ 우리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도저히 사람이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반가우면서도 무서웠다.

침묵도 잠시 날다람쥐가 용감하게 길을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와요?”

“길 나와요.”

더는 물어볼 틈도 없이 남자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염병하네. 누가 길 나올 줄 모르냐?”

입담 좋은 춘심이가 판초 입은 그의 뒤통수에 말을 확 뿌려버렸다.

둘이 마주 보면서 웃었다. 길이 있다는 그 남자의 말에 안도감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날씨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위험하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막다른 곳에서 운 좋게 돌아 나왔다. 얼마 전 내가 운영하던 카페 <집>에서 자존심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일을 당했을 때도 한줄기 노래와 강아지 산이 와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며 그 지독한 모멸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옆과 옆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날도 마찬가지다. 혹시 그게 새든 지, 나무든지, 구름이든지, 무언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 상황 속에서 꺼내 주는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될 때마다 나는 마음을 곱게 쓰자고 다짐한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비 맞은 날다람쥐와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물론 우리가 차를 주차했던 그 길은 아니지만 길이 분명했다. 긴장이 풀리자 그때야 119가 생각났다. 비를 홀딱 다 맞은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기침을 했다.

이런 날씨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때 겪어봐서 나는 알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인순이는 진여를 보고 장난을 쳤다. 이것을 본 영아가 웃지도 않고 낮게 말했다.

“운전 똑바로 해라. 여기서 사고 나면 여러 집 단체로 병풍 친다.”

겁먹은 영아 말투에 나는 삐그시 웃었다.

“음악 좀 꺼라!”

영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나를 다그쳤다

‘6시 전기헌 세상의 모든 음악’을 핸드폰으로 듣고 있었다. 나도 엄청 무서웠지만, 노래를 들으면서 태연한 척했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한계령을 설설 기어서 내려가고 있었다. ‘먼 낭만을 만끽 허겠다고 터널 두고 꾸불꾸불헌 길을 돌아, 진짜 무슨 일 생기면 어떤 허지’ 어쩌다 올라오는 차 불빛만 보이면 동지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모두 캄캄한 창밖만 말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

속삭이듯 내가 말을 했다.

다들 웃을까 말까, 입술이 실룩거리던 참에 오색약수터 푯말이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트로트 틀어봐.”

영아가 말했다. 빵 터졌다.

긴장이 풀어진 바퀴가 미끄러지듯 불빛을 따라갔다.

차도 밥을 먹여야 해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셀프였다.

“어쩌까, 큰일 났네” 내가 말했다.

용감하고 모르는 것 없는 인순이가 영아 보고 따라 내리라 했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인순이가 말했다.

“누워서 죽 먹으면 흘린다. 느그들 알다시피 나는 기계치.”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해본 소리였다. 실제로 나는 정말 길치에 기계치다. 어디 둔한 데가 그뿐이랴. 친구들은 대충 그 정도에서 나를 봐주는 데 익숙하다.

후진항, 물치항을 지나 대포항에 도착했다. 목적지 없이 달린 우리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모래알에서 싹트냐’ 천천히 느리게 깜깜한 바닷가를 돌아다녔다.

나는 강원도 하면 대포항이었다. 몇 년 전 대포항을 왔을때 신도시처럼 낯설게 변해 차를 돌려버렸다. 그 이후로 오늘 처음 왔다. 평창동계올림픽 때문에 개발을 한 것이라 했다.

항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횟집, 가게 앞에 내놓은 붉은 통마다 펄떡거리던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비가 샐 것 같은 지붕 아래 앉아 소주 한 잔에 회 한 점 ‘캬’ 손등으로 입가를 닦던 맛이 사라져 버렸다. 그물코가 풀어진 듯 어설픈 멋은 사라지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깔끔해서 오히려 멋대가리가 없어진 항구가 거기 무표정하게 펼쳐져 있다.

3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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