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의 최후206
바나나의 최후
어느 설치미술 작가처럼 나도 액자에 바나나를 붙였다. 3초도 못 버티고 떨어졌다.
얼마 전, 집에 들오는 길 단골 속옷 가게에 들렀다. 오다가다 한 번씩 들른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사장님께서 과일 도매상에 데려다주라고 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꼬불꼬불한 길로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상상을 초월한 물류창고였다. 태어나 처음 본 과일 창고였다. 우리나라에서 팔고 있는 과일은 다 있었다. 과일 박스가 쌓여있는 곳은 추워서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비비며 흥분했다.
같이 간 사장님은 직원을 찾아 상자를 말차에 실었다. 나도 바나나 두 박스, 오렌지 한 박스 실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나눠준다고 사지 말라고 했다. 친구들 주려고 살 거라고 했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수박 토마토 바나나는 돈 주고 사 먹는다.
혼자 사는 사람은 수박 사 먹기 힘들다. ‘언제 저걸 다 먹냐고’ 토마토는 텃밭에 겁나게 심었다. 오렌지는 바나나 옆에 있어 그냥 샀다.
우리가 산 과일은 하루 지나면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한 박스에 오천 원 ‘옴매 환장 허겠네’ 하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과일 창고는 곧 곤지암으로 이사 간다 했다. 여기도 LH 신도시에 포함되었다. 이사 갈 주소를 받았다.
집에 와 토박이식당, 하비비 언니, 뒷집, 혼자 사는 아저씨, 밭에 가는 아줌마 마구 나눠줬다. 바나나는 한 상자 조금 안 되게 남았다.
티브이를 보다가도 노트북을 켜다가도 바나나를 먹었다. 저녁 대신 바나나 껍질을 벗겼다.
어느 설치 미술작가의 벽에 붙인 바나나가 생각나 액자에 붙여봤다. 떨어졌다. 의자에 붙였다. 또 떨어졌다. 에라, 먹어버렸다. 잠이 안 와 쇼를 한 게 아니었다.
바나나 하나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하기야, 예술인데 붙이는 것도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겠지.
날이 샜다. 바나나를 아점으로 먹고 있는데 택배가 왔다. 20대 남녀였다. 부부 같은데 너무 젊었다. 여자는 땀을 연신 닦으며 닭 사료를 들고 집으로 걸어 내려왔다.
“이 더운데 점심은 먹었어요.”
“있다가 가서 먹으려고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나는 집으로 들어가 바나나 여섯 개, 오렌지 세 개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연신 땀을 닦으며 잘 먹겠다고 했다.
이틀이 돼도 바나나는 굴지 않았다. 날파리가 바나나 껍질에 떼로 달려들었다. 바나나에 검은 점이 생겼다. 자동으로 가무잡잡 해졌다. 비닐에 싸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며칠이 났을까, ‘바나나 먹어 없애야 헌다’ 이리 가도 바나나, 저리 가도 바나나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입으로 없애야 할 바나나를 머리로 먹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검정비닐봉지를 끄집어냈다. 바나나는 미끄덩거렸다. 죽처럼 흐물흐물했다. 손으로 들어 올리자 쳐져 버렸다. 껍질도 새까맸다. 속도 군데군데 까무잡잡했다.
밖으로 들고나가 땅에 파묻었다.
누구는 바나나를 벽에 붙이고 억 단위 넘는 돈 받고 팔았는데, 나는 다 먹지도 못 하고 썩히고 말이야. 욕심도 부릴 것 부려야지. 차라리 그 젊은 남녀 몽땅 줄 것을.
실은 그날 뭔가 찜찜해 집에서 바나나와 오렌지를 들고나갔다. 어느새 트럭 꽁무니에 그려진 눈이 나를 보며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랴, 어리석은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