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오토바이
사자와 퀵써비스23
언덕에 살구꽃이 다 졌다. 꽃이 진 자리를 지나 나무 사이로 잔별들이 밤하늘에 매달려 있다.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치커리를 땄다. 늦은 저녁을 챙겨 먹고 TV를 켰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쇠똥구리가 코끼리 똥을 말아 굴리며 집으로 가고 있다. 이층 버스 6대를 한 사람이 밀고 가는 무게를 쇠똥구리는 밀고 간다. 쇠똥구리는 바늘귀만 한 뇌를 가졌다.
쇠똥구리를 보다가 올겨울 길가에 쓰러져있던 오토바이가 생각났다. 그날 이곳 산밑으로 이사할 집 청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눈이 풀풀 날리었다.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물류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검은 오토바이가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오토바이에 아무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누구 하나 일으켜 세울 마음도 없어 보였다.
넘어진 오토바이를 보다가 오래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검은 갈기 사자가 떠올랐다. 사자는 나무 그늘에서 누워있었다. 파리가 날아와 콧잔등에 달라붙어도 고개를 젓지 못했다. 꼬리는 땅바닥에서 까닥거릴 뿐이었다. 털이 듬성듬성 벗겨져 있었다. 영역싸움에서 젊은 수사자에게 밀려난 것이다. 한때는 갈기를 휘날리며 정글을 휘어잡고 무리를 지키기 위해 뛰어다녔던 수사자는 어느덧 병들고 늙어버렸다. 파리 한 마리를 쫓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수사자와 달리 암사자는 가족들 먹을 것을 위해 사냥을 했다. 그야말로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시속 56킬로 속력으로 달렸다. 누, 사슴, 순록, 임팔라, 기린의 숨통을 단방에 조였다. 사냥할 때마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암사자가 절대 속력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새끼들의 배고픔이었다.
그날 눈이 푹푹 쌓이는 오르막길을 올라 채지 못하고 종점에 차를 세워두었다. 순식간에 쌓인 눈을 밟으며 이사할 집을 향해 엉금엉금 걸어갔다.
나는 왜 쓰러진 오토바이를 보고 사자가 생각났을까. 눈 속을 걷는 내내 오토바이와 사자가 오버 랩 됐다. 오토바이는 누가 버린 것일까? 버리려고 했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던져 놨겠지. 그렇다면 어쩌다 이 먼 곳까지 와서 길가에 쓰러져있을까.
지구 몇 바퀴를 돌았을 검은 갈기의 오토바이. 저렇게 누워있다가도 주문이 들어오면 눈을 털고 벌떡 일어나겠지. 어느새 바퀴는 사자의 다리로 변하겠지.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겠지. 주문받은 물건을 싣고 갈기를 휘날리며 영하의 날씨를 뚫고 달리겠지. 빌딩과 아파트와 주택 골목 구석구석 벨을 누르겠지. 검은 사자는 일이 끝나면 터벅터벅 목구멍에 쇳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가겠지. 별도 총총 걸어 나오겠지. 새끼들과 검은 사자는 부릉부릉 구겨져 잠이 들겠지.
나는 눈 속을 푹푹 빠지면서 걷는 내내 오토바이는 사자로, 도시는 밀림으로, 빌딩은 바오바브나무로 변하는 상상을 했다.
그날 눈은 그치지 않았다. 청소를 끝내고 방이동 집으로 가는데 오토바이는 아직도 두 다리를 든 채 옆으로 누워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을 털어주려고 차를 세우려다 그만뒀다. 눈발이 순식간에 뒤따라오는 바퀴 자국을 완전히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 걱정되었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1초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길가에 쓰러진 오토바이가 사라졌다. 오토바이는 주문을 받아 눈을 털고 지금 어느 집 벨을 누르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오늘도 철가방 택배 퀵서비스 대리운전자들이 미로의 정글 속을 내달리고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 밑 밤하늘 별들이 곧 쏟아질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하는 동안 TV 속 쇠똥구리는, 바람과 달과 남쪽 은하수를 나침반 삼아 아직도 먼 집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