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치의 생쑈 21

풀치의 생쑈 21

by 불량품들의 사계

풀치의 생쑈


“누님 싸랑해!” 풀치는 밤낮으로 술에 취해 골목 입구에서부터 소리치고 걸어온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시골은 담이 없어 무방비 상태다. 담이 있더라도 낮아서 고개를 넘나든 말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 마구 뛰어다니는데. 내가 저랑 손을 잡았어, 밖에서 밥을 같이 먹었어. 마을 사람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리세요! ”

“나는 못 내려!”

오늘도 풀치는 예고편 없는 드라마를 찍는다.

나는 마당 불부터 껐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티브이도 켜지 않았다. 정말 민방위 훈련한 것도 아니고. 불이 켜져 있으면 평상에 앉아 나를 나오라고 난리를 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 말소리는 풀치가 택시 기사랑 실랑이하면서 지랄 옆차기를 하는 소리다. 무전취식은 기본이고 이제는 택시 무임승차까지 한 모양이다. 택시 기사 욕 소리와 함께 차 가는 소리가 들렸다.


풀치는 마당으로 언제 내려왔는지 평상에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너 혼자 배 해라, 나는 절대 항구 못 헌다’. 나는 방 불빛을 다 죽이고 산이랑 납작 엎드려 있었다.

지금 풀치가 하는 짓은 술주정뱅이의 추태다. 술고래가 여자를 쫓아다니다가 사랑을 움켜쥐든가, 술병으로 죽든가, 흘러간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는 짓거리다. 동네 주민들은 저 재방송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주민들은 나랑 마주쳐도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심지어 성길씨까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끼리끼리 노는 것이야” 하는 것 같아 내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풀치랑 도매급으로 넘어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밖이 조용했다. 벌써 갔나? 밖에 귀를 세우는 순간 “불이야!” 요 란한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마당 입구 건너편 가로등 아래서 불이 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바케스를 들고 몰려와 불을 껐다. 남자 한 명이 근처에 있는 벚나무를 꺾어 와 불을 마구 때렸다. 벚꽃이 불 속으로 떨어졌다. 나도 바케스를 가지러 갔다. 바께스에 물을 담아 마당으로 나온 사이 불길이 잡혔다. 남자들은 발로 불씨를 비벼 껐다. 다행히 불은 금세 꺼졌다.

주민이 집에 들어가다 풀치가 전봇대 아래 서 있길래 소변을 보는 줄 알았다고 했다. 커브를 트는데 불길이 솟았다고 했다. 주민들은 지금껏 풀치가 술을 퍼마시고 쇼를 해도 불은 지르지 않았다고 했다. “술은 마셔도 사람은 순했는데 갑자기 왜 저러지?” 옆집 아줌마가 말했다.

나는 뜨끔 했다. 풀치는 동네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는 내게 외롭다고 했다. 그가 어쩌다 술을 마시지 않고 내게 말을 걸면 풀치 말에 반응을 해주었다. 그냥 그가 짠했다. 하지만 풀치가 술 마시고 마당에 내려오면 나는 아는 척도 안 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풀치는 나를 밖으로 불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불을 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품은 불, 삼킬 줄도 알아야지.

나를 향한 풀치의 지랄 앞차기도 오늘 밤 불처럼 금방 꺼지기를 바랐다.

나 어렸을 적 시골에 속사포처럼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여인의 입술 끝에 매달린 말은 순식간에 담을 훌쩍 넘었다. 아주 동네를 방방 휘젓고 다녔다. 처녀총각 손만 잡아도 애를 낳아 그 애가 달려 다닌다고 소문을 냈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 말발굽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 여럿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짜뉴스가 있었네. 아따, 풀치 말하다 삼천포로 빠져버렸네.

그 시절을 생각하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나팔수가 분명 있을 텐데. 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오늘 밤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도 풀치를 신고하지 않았다. 그가 불쌍해서? 아니면 유령 취급해서? 술 마시고 더 땡강 필까 봐?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집으로 들어와 다시 라디오를 켜려는 순간, 연자방아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풀치는 밤새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는 새벽까지 멈추지 않았다.

“저 인간은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참말로 체력도 좋다. 그래 체력은 국력이다!”

“내 오지랖이 심해 니말을 가만히 들어 줬는디. 니몸 니가 알아서 챙겨라. 너랑 정들기 싫다. 앞으로 내가 이 동네에서 편히 살라먼 니 말을 도저히 못 들어주겄다.”

배추가 밭에서 뽑힌 채로 고춧가루 바르고 식탁에 앉아있냐?. 밭에서 배추를 뽑아 소금에 절여서 마늘 액젓 갖은양념을 넣어 버무려서 식탁에 올라오지. 풀치! 나 겉절이 안 좋아해. 그리고 무조건 들이대는 게 장땡이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풀치는 마당에 자빠져 있다. 말아 감아올려진 티 아래로 풀치 배가 보였다. “그 게 몸뚱아리냐?” 풀치 갈비뼈가 드러났다. 빨래판 같았다. 왠지 풀치 마른 갈비뼈가 나를 신경 쓰게 하였다.

풀치는 겨우 일어나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봄인데도 그의 몸은 앙상한 겨울나무였다.

그 나뭇가지에 싹이 올라오는 것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박스를 실은 채 넘어져 있는 밀차를 길가 옆으로 가만히 세워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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