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산을 타러 온 사람들이 최대한 덜 걷기 위해 차를 산 턱밑까지 끌고 올라온다. 어느 날 주인이 사유지라면서 그 꼴이 얄미워 쇠말뚝을 박고 쇠줄에 자물통까지 채워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하는 수 없이 뒷바퀴에 돌을 바쳐 놓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좁은 길가에 바짝 붙여 놓은 차를 빼려면 전진과 후진을 거듭해야 겨우 돌려 나올 수 있다. 눈이라도 와서 바닥이 얼어버리면 욕이 절로 나온다.
고골로 이사 온 후 나 외롭다고 자주 찾아온 동생들이 있다. 마을 안팎에서 자연스럽게 아홉 명이 모인다. 내가 모임 이름을 갑오라 정했다. 9라는 수는 넘치지 않고 왠지 찰랑거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갑오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정상을 얼마나 해찰하면서 걷는지, 한 시간 반 이상 걸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빨리”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반대 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모이면 단체방에서 어긋나는 카톡 소리로 바람 잘 날이 없는데 갑오는 거의 없다. 아니 없었다.
갑오는 먹을 것을 허리가 휘도록 배낭에 싸 왔다. 수육 갈치속젓 상추 묵은지 고등어조림 홍어를 돗자리에 펼쳤다. 이차림은 기본 스텝이다.
내 체력이 될 때는 신안에서 올라온 얼린 병어와 도마를 매고 산에 갔다. 정상에 도착할 때쯤에는 얼었던 병어와 막걸리가 녹았다. 그것을 칼로 썰어 막걸리 안주로 먹었었다. 그럼 옆에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 광경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지나간 사람들에 나는 앉으라고 권했다.
언젠가 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다.
우리는 기본 스텝을 배에 잔금이 나도록 먹었다. 막걸리를 마셨지만 땀이 식자 추웠다. 수어장대를 찍고 장경사까지 싸묵싸묵 걸어갔다 돌아왔다. 우리는 조심조심 산에서 내려왔다.
아까 보았던 돌을 받친 트럭은 그대로 서 있었다.
“어이 돌팎 너 힘 안 드냐? 나는 작대기를 짚고 걸어도 힘든디”
“언니, 업힐랑가?”
힘도 제일 없게 생긴 애경이가 나를 업는다고 하자 다들 깔깔거렸다.
사실 사유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확실치가 않았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루는 하남시청에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성길씨가 “조용히 사세요”라고 충고를 했다. 수십 년을 이곳에서 산 토박이가 하는 말인데... 나는 일이 꼬일까 봐 가만히 꼬리를 내렸다.
사람들은 차를 받치고 있던 돌멩이를 길섶이나 골짜기에 휙 던져버리고 차에 오른다. 무심히 길섶에 버렸던 돌멩이를 다음에 와서 찾으면서도 말이다.
승용차나 트럭을 받치고 있는 돌멩이들을 보면 그 무게를 견디는 아슬아슬한 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누구를 받쳐준 적 있었던가. 내가 누군가를 받쳐준 기억보다 그 반대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다. 우리 또래들은 달밤에 몰래 벚꽃을 꺾기 위해 절이 있는 뒷산에 올라갔다. 나는 친구가 받쳐주는 등을 딛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그때 달빛을 받은 벚꽃이 얼마나 눈부셨던가! 그 희고 여린 빛에 홀려 밤이 무서운 줄도 몰랐다. 팝콘을 볼 때마다 그때 한꺼번에 터진 벚꽃과 꽃을 꺾다가 스님한테 들켜, 달빛을 등지고 면사무소 아래로 냅다 뛰어 도망갔던, 등을 내주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애경 연주 점심 미선 써니 성혜 은정 순원 나의 갑오들아! 느그들도 나를 지금껏 받쳐준 돌멩이어야.”
내 옆에 이런 돌멩이들이 수두룩하다. 그 흔한 돌멩이가 축대를 쌓을 때 발파석에 생긴 틈을 메꾸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