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면서 그 정도면 됐지 19

세 살면서 그 정도면 됐지 19

by 불량품들의 사계

세 살면서 그 정도면 됐지



일요일 아침이다. 동물농장 프로를 기다리다 창을 내다봤다. 아침부터 성길씨가 밭에서 상추를 솎아내고 있었다. 그의 노모는 밭 가장자리에 앉아 상추를 다듬고 있다.

하늘은 물청소한 듯 맑고 깨끗했다. ‘동물농장’이 끝나자 산에 가려고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어디가?”

“산에 갈라고요”

“상추나 다듬어”

성길씨 엄마께서 쭈그리고 앉아 말을 건넸다.

주인 성길씨 밭은 시금치와 상추가 빽빽하게 자랐다. 내 밭에는 원형탈모에 걸린 것처럼 군데군데 비어있다.

“아따! 정말 부드럽네”

빨리 상추를 다듬고 산에 갔다 올 생각으로 할머니 옆에 철퍼덕 앉았다.

“우리 상추 잘 자랐지?”

성길 씨 노모는 구순이 다 되어 가지만 정정하시다. 할머니가 나를 보면서 웃었다.

“내 밭 상추는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겄어요?”

“햇빛을 덜 받아서 그럴 거여.”

할머니는 또박또박 말을 했다.

“호두나무가 그늘 맨들고 막사가 햇빛을 가려 그렇구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할머니가 말했다.

“세 살면서 그 정도면 됐지.”

“ ...... ”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일단 할머니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셋이 잠시 말이 끊겼다. 성격이 급해 어색함을 못 견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오늘 처음 말하는 건디요. 할머니!”

“아! 그으으 게 아니고 해에빛이 그그 정도면.”

환갑이 다가오는 노총각 성길 씨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나도 열 받아 상추를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꾸욱 참았다.

세입자는 햇빛도 월세만큼만 쫴야 헌다요? 그렇게 법에 나와 있습디까?

입속에서 가시 돋친 말이 돌아다녔다.

할머니는 평상시에 나한테 엄청 친절했었다.

나는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먹을 것 가져오면 무조건 주인집에 갖다 드렸다. 나 먹으라고 귀한 것 사 오면 사 온 사람이 섭섭할까 봐, 그 사람 가고 나서 할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학교 가져가셔서 친구분들이랑 드시쇼” 할머니는 시에서 운영하는 노인학교를 다닌다.

어느 날 할머니는 양은그릇 안에 삼겹살 세 줄을 깔고 그 위에 상추 세 장을 올려놓고 믹스커피 두 개를 담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히 끄레 한 집 외벽에 페인트칠할 때도 집을 이쁘게 꾸민다고 손수 라면을 끓여준다고 했었다. 내게 그렇게 마음을 쓰던 할매가 야박한 주인 티를 내니 황당할 수밖에.

우리 엄마 요양원에 있을 때가 생각나 더 할머니를 챙겼다. 자식들이 자주 오는 노인들은 거기서도 기가 사는 법이다. 그런 일 저런 일이 생각나 상당히 섭섭했다. 산에 가려는 것은 종 쳐 버렸다.


벌써 시간이 오후 두 시다. 갑자기 친구와 동생들이 놀러 왔다. 밭에서 잘라온 부추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평상은 시끌벅적했다. 성길씨는 노모 때문에 아직 보일러를 돌려야 해 연탄 가지러 창고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동생 한 명이 참외를 깎아 성길씨 입에 넣어주려 했다. 성길씨가 손에 연탄이 묻어 받아먹지 못하고 손을 닦는 동안 그 동생이 기어이 먹여주었다.

“춘향이 났다. 먹여주기까지 허냐!”

할머니한테 화난 것을 아직 털어내지 못한 나는 삐져서 성길씨한테 화풀이를 했다.

평소에 내 행동하고 틀려 성길씨 입에 참외를 먹여주던 동생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애들에게 오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진즉 할머니한테 부침개 갖다 드리라고 했을 것이다.

시끄러웠던 마당에 어둠이 내리자 다들 떠났다. 나 혼자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성길씨 여동생이 나에게 보낸 카톡이 떴다.

“한집 사니까 오빠 엄마 좀 도와주세요. 맛있는 거 사 드릴께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네, 다 같이 힘내요.”

정말 성의 없는 답이었다.

주인 성길씨 여동생한테 이런 문자 받기는 처음이었다. 나 혼자 추측해 보았다. 성길씨가 여동생한테 엄마가 햇빛이 어쩌고 저쩌고 했다고 말을 했나.

며칠이 지났다. 키는 작지만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성실이 동생이 놀러 왔다. 용인에 살지만, 나랑 자주 보는 사이다. 이십 년 나이 차가 나지만 친구처럼 잘 지낸다.

“언니는 평상에 앉아 산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없겠네요.”

“방에 얼른 들어가자”

“왜요?”

“하루에 9천 원어치만 햇빛 쫴야 헌단 말이여. 오늘 치는 다 쬔 거 같다야.”

“뭔 말이에요?”

“음, 이 집 월세가 27만 원이니까 햇빛 값이 하루에 9천 원이재.”

할머니와 전에 있었던 일을 성실에게 세세하게 말을 했다. 성실이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웃다가 평상에서 떨어질 뻔했다.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정정하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꼭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옹졸한 나의 뒤끝은 봄날 호두나무 그림자만큼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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