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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08. 2023

불량품들의 사계

땡감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29

땡감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투덜투덜 땡감이 마당에 떨어지고 있다. 땡감을 보자 문득 그녀들이 떠올랐다.

     

산 밑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이었다. 내가 방이동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앳된 아가씨 둘이 하얀 운동화를 신고 감나무 아래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맨 얼굴이었다. 해가 비쳐 있어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들 뒷모습을 보았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은 햇빛에 반짝이는 금빛 바다 같았다. 꼿꼿한 허리는 가파른 세상에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녀들을 보고 순간 왜 활짝 핀 해당화가 떠올랐을까.

그 모습이 너무 상큼했다. 사회생활에 아직 물들지 않아 그렇게 보인 것일까. 그녀들의 풋풋함을 보고 나도 저런 날이 있었나... 그녀들은 붉은 벽돌 이 층집 대문을 지나 쪽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갔다.      

나도 젊은 날 자취를 했었다. 방 구하러 다닐 때 부동산에서 쪽문으로 들어가는 방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런 방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 대부분 계단을 두세 개 내려가 집 뒤로 돌아간다. 나의 젊은 시절과 그녀들의 지금이 오버 랩 됐다.

그녀들은 엄마가 보내준 김치에 어쩌면 라면을 먹고 있을지 모른다. 설거지를 쌓아놓고 얼굴에 붙인 팩을 손가락으로 당기며 깔깔거리다 두 발을 허공에 굴리고 있을지도...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릴 수도 있다.

“옆집 세희 취직했다고 즈그 엄마가 방금 자랑치고 갔다. 놀먼서 뭐가 그리 바쁘다고 전화 한 통이 없냐? 밥은 먹고 댕기냐? 그러다 속 다 배려야. 라멘만 먹지 말고... 듣고 있냐? 집에 한 번 들러 반찬도 갖고 가고, 밥도 먹고 가고... 니가 좋아하는 미역 줄기도 볶아놓고 고등어 쪼리고 갈치도 구어 놀랑께” 엄마는 속사포로 당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들도 그 옛날 자취할 때 나처럼 엄마에게 그런 전화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도시에 살면서도 귓가에 들리는 파도 소리를 마음 한구석에 쌓아놓았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마음을 핥고 가는 바다에 누워 가라앉았다가 떴다를 반복했다     

내가 뛰어놀던 갯벌과 파도 자락과 엄마 생각이 났다. 꽃게, 깡다리, 꼬막, 짱뚱어, 농게, 해파리가 그립다. 밤이면 썰물을 따라가지 못한 해파리들이 뻘밭을 덮어버렸다. 어른들은 등불을 켜 들고 뻘땅으로 갔다.  나는 뒤를 따라 나섰다. 어른들은 해파리를 잡아 바께스와 지게에 싣고 왔다. 엄마가 무쳐준 살아있는 해파리 초무침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숭어 창자로 담아준 ‘또라젓’은 또 어쩌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그 옛날 세종호와 한양호가 파도 위를 미끄러지듯 들어오면서 뱃고동을 울리던 것도 떠오른다. 배에서 던져준 환타를 수영하던 친구들이 들고 나오면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이제는 찐빵을 팔던 들뜬 선착장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부웅부웅 부우웅...... 그 시절이 그리울 때 산 밑 평상에 혼자 앉아 환타병에 바람을 넣어 뱃고동 소리를 내어본다.


도시로 유학을 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게으른 나는 지금껏 하나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이제는 닻을 내려야 할까.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내 뒤쪽 어디선가 그것들은 여전히 나를 맹렬히 쫓아오고 있다. 꿈이란 어쩜 죽을 때까지 이렇게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건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잡힐 듯 멀어지는 언어의 바다를 항해 중인가 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화가 해당화였다. ‘미인의 잠결’ 해당화의 꽃말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잠결에도 놓쳐버린 꿈을 꾼다. 지금도 5월이면 학교 담장 밑 화단에 해당화가 피어 갯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고향도 직업도 알 수 없는 그녀들의 앞날에 건투를 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해당화를 마당가에 심었다. 아침저녁으로 해당화에 물을 줄 때마다 바닷가가 떠올랐다.     

마당에 떨어진 땡감을 가만히 깨물었다. 여전히 땡감 너머는 아리고 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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