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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14. 2023

불량품들의 사계

저 귀신을 어떻게 할까 31

저 귀신을 어떻게 할까 



풀치는 어제 아침 처마에 달아놓은 종을 미친 듯 쳐댔다.

오늘은 마당 입구에서 몇 개 남은 이를 드러내고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도대체 저 뻔뻔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나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고 고무호스로 마당에 열을 식히려 물을 뿌렸다.   

     

풀치는 어제 아침내 평상에 앉아 내 이름을 한 시간은 넘게 불러대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노래로 돌렸다. 내가 대꾸를 안 했더니 종이 깨지도록 쳐댔다. 처마 밑까지 침범해서 종 칠 사람은 풀치밖에 없다. 택배 분들이나 처마 밑으로 들어서지 함부로 남의 집 입구에 들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종을 치면서 말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주인 성길 씨도 처마 밑으로 지나가지 않는다. 풀치는 무슨 배짱으로 날마다 제집 마당 드나들듯 내 집 앞에 찾아와 저 난리를 피는지.     

“그래 너랑 오늘 진짜 종 다. 징허다!”     

풀치는 내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종을 칠 기세였다. 나는 끝까지 안 나갔다. 창으로 내다봤다. 땅바닥에서 구르다가 평상서 드러눕다가 그야말로 생쇼를 했다. 나도 성질이 있다.

이 술고래야! 네가 아무리 그래 봐야 나는 꿈쩍도 않는다. 다짐을 몇 번이나 했다. 오늘은 꼭 보여주리라.

풀치는 엄마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를 걸어 다니는 송장 취급해 단지 안쓰럽고 짠해 마음을 써 줬을 뿐이다. 그 이상을 나에게 원하는 것은 풀치가 오버하는 것이다.


잠시 마당이 조용했다. 주인 성길 씨에게 담배를 받아 태우나... 살짝 문을 열고 문턱에 발을 걸치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풀치는 마당 입구에 서 있고 성길씨는 안 보였다.

그 순간 ‘이필하’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매일 와서 사진으로 이 마을을 기록하는 사진가이다. 그가 연자방아 아래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연자방아 쪽 아래 핀 패랭이, 우단동자, 마가렛, 상사화가 작살 나버렸다.

올 초, 내 고향인 신안 지도 현충 오빠네 집에서 상사화, 패랭이, 우단동자, 마가렛을 가져다 심었다. 사촌오빠네 백양 집에 가면 언덕에 수많은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또 마당 잔디밭은 얼마나 깔끔하게 다듬어 놓았는지, 나도 우리 집을 그렇게 꾸미고 싶었다.

    

가느다란 줄기에 붉은 꽃 상사화는 잔바람에도 쉬 살랑거린다. 패랭이는 가냘프지만, 세련된 아가씨 같다. 패랭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뿌리째 던져놔도 손톱만큼만 기댈 곳이 있으면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운다. 패랭이는 밭 가장자리를 다 덮을 정도로 전투력을 뽐냈다. 우단동자도 마찬가지다. 검붉은 색 꽃이 고고한데, 빈 곳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정도로 붙임성도 좋다. 마가렛도 장소를 탓하지 않고 방긋방긋 여기저기 자리 잡았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꽃들은 이곳 꽃샘추위와 진눈깨비는 잽도 안 됐다. 마찬가지로 갯바람을 맞고 자란 나도 남한산성 산 밑 이곳까지 와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나는 상사화 패랭이 우단동자 마가렛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았다. 이파리가 나부끼며 나도 따라 흔들렸다. 어느새 우리는 닮아가고 있었다. 나와 꽃들은 동지애가 생겼다.

그런데 풀치 저 인간 때문에 꽃들이 다 자빠져 버렸다. 사진을 찍어 식구들 단체 방에 올려 자랑했었는데...

풀치 저 인간이 꽃 무더기로 넘어지며 꽃들을 껴안고 뒹구는 통에 허리가 꺾이고 목이 달랑거리다가 고개를 땅에 박아 버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끄덕하면 옷 통을 홀딱 벗는 풀치는 지금도 티셔츠를 벗어 땅에 던졌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 ㅅ ㄹ 누 우 님! ”

“이게 미쳤나? 적당히 해라. 니가 홀 딱 벗고 새도 아니고 사람대접해 줄 때 받어라.”

“내가 안동 김씨야!”

풀치는 심각성을 모르고 가슴을 젖히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갈비뼈 보기 싫으니 당장 옷 입어라. 신고 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고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 제발 어디로 좀 가야!”

풀치는 웃으면서 내 집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차차. 내가 이사 와서 벽을 칠할 때 거기에 내 짧은 시 <이장>을 써 놓았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써 놓았다. 아이고 이런! 나는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지미!” 욕밖에 안 하던 내가 이 팔 저 팔 풀치에게 마구 욕을 해댔다.     

사진가께서도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봤는지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동안 그는 평상에서 우리 지인들과 밥도 먹고 사진도 많이 찍어줬던 사람이다. 나랑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착각했던 건가? 나랑 친하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이라도 날까 봐 자기 몸을 사리는 건가? 아님 나랑 풀치가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걸로 생각을 했나? 눈에 좋다고 블루베리 주스 한 박스를 사다 문 앞에 놓고 갈 때는 언제고... 나이 더 든 사람이 한마디 해주면 쓰겠구만... 나는 그의 뒤 모습에 과하게 열을 내고 있었다. 곤란에 처한 내 상황만 생각했지 사진가 선생의 입장은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성길 씨는 도대체 어디를 갔는지 콧등도 안 보이고. 허기야, 있으나 마나지. 풀치는 취했는데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옷을 주워 들고 맞은편 골목으로 비틀거리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풀치는 어제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손을 흔들며 지금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내가 꼴도 보기 싫어 눈길을 안 줬더니 민망했는지 중얼거리다가 갔다. 네가 가든지 말든지. 내 할 일을 하는데 왜 이리 풀치 뒷모습이 그리 눈에밟는지?


우리는 어쩌면 수많은 말과 표정을 뒷모습에 숨기고 사는지 모른다. 눈과 입이 없고 코가 없어도 익숙한 동네 뒷동산같이 다정하면서 해 질 녘만큼이나 쓸쓸한 언덕을 닮은 사람들, 그 무수한 뒷모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풀치의 쓸쓸한 뒷모습에 모진 미움이 또 무너졌지만, 지금은 걷어 낼 것은 걷어내야 한다.

 “나는 귀신인가 보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외로울 수가 없다.”

옛날 사람 말이 떠오른다. 나도 한때는 귀신이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밤이면 귀신이 되어 그리운 기억 주변을 서성거린다. 동네의 살아있는 유령인 풀치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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