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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21. 2023

불량품들의 사계

풀치와 깜순이 34

풀치와 깜순이



              

빗방울이 빨랫줄만큼 굵어졌다. 봉숭아꽃에 생기가 돌았다. 방안은 썰렁했다. 홑이불을 차고 처마 밑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풀치가 데리고 다니는 꼬리가 짧고, 새끼 곰처럼 생긴 강아지 깜순이가 연자방아 기둥 아래 묶여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풀치는 흔적도 없다. 창고에서 우산을 꺼내 쓰고 풀치를 찾아 나섰다. 깜순이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다. 풀치가 눈에 띄어야 맘이 놓일 것 같아서였다. 비록 내가 오지랖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저 깜순이를 맡아 기를 수는 없었다. 저 큰 개를 끌고 집 없이 흘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스종점으로 내려갔다. 풀치가 정류장 벤치에 앉아 소주 퍼마시는 모습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풀치는 보이지 않고 빗방울만 더 세졌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 올라와 풀치가 술 취해 사라진 맞은편 골목까지 들어가 봤다. 골목 안에 풀치가 살고 있다는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골목 안마당 물류창고엔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빈 박스가 쌓여있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집 비슷한 것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럼 저 물류창고 어디에서 풀치가 산다는 말인데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풀치야 너도 참 갑갑한 인생이구나’

지금 본 현장이 내 추측에 불과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나중에 성길씨한테 들으니 풀치는 정말로 물류창고 컨테이너 이 층에서 산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찌질한 알콜 중독자라고 해야 할지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아예 신경을 꺼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난해한 인간이다.     

나는 연자방아로 돌아왔다. 깜순이 옆에 생라면이 던져져 있었다. 풀치는 자전거 바퀴를 잠그는 자물쇠로 야무지게 연자방아 기둥에 강아지를 묶어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깜순이는 내가 다가서자 겁먹은 얼굴로 꼬리를 엉덩이 사이로 숨겼다.

“이 염병할 풀치!”

냉동실에 있는 닭 가슴살을 꺼내 팬에 익혀 물 하고 갖다 줬다. 깜순이는 먹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자리를 피해 처마 밑으로 물러났다. 그제야 깜순이가 시멘트 바닥에 던져진 닭 가슴살을 먹고 물도 마셨다. 얼른 물그릇을 갖고 집에 들어왔다. 깜순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풀치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깜순이는 배가 부른 지 호두 껍데기를 주워 앞발로 굴리다가 이빨로 깨물며 놀고 있었다.     

“혹시 술고래 어디 갔는지 알아요?”

“새벽에 묶어 놓고 갔어요.”     

마당에 나오는 집주인 성길 씨에게 물었다.

“이 이른 시간에 깜순이를 묶어 놓고 어딜 싸돌아 다니는지” 돌아서는 성길 씨 등 뒤에 대고 투덜거렸다.


성길 씨가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깜순이 옆으로 가 앉았다. 손등으로 옆구리를 만져 줬다. 깜순이는 경계를 풀고 내 손등을 핥았다. 까마귀가 날개를 털며 빗속을 뚫고 날아간다. 깜순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나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지랖은 이미 발동되었다. 깜순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풀치 옆에서 탈출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거세지는 빗방울 소리가 내 결심만큼 커져갔다.     


성길씨는 끄떡하면 풀치에게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나에게 한다. 동네 주민들은 술에 취한 풀치를 유령 취급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풀치가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우리 집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풀치가 멀쩡할 때도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인지. 그렇지만 성길씨도 깜순이가 신경이 쓰였는가 보다. 그도 길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저녁때 고양이 물그릇에 물을 받아다 주고 들여다보는 눈치였다.     


며칠 전 맨 정신의 풀치가 깜순이를 데리고 밭에서 상추를 뜯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풀치는 평상에 앉아 막사 안 개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나에게 진지하게 깜순이를 키우라고 했다.

“누님이 키우기 딱이네.”  

‘뭐? 내 오지랖을 아는 거여 뭐’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님이 강아지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저 개집은 성길 씨가 옛날에 키우던 개집이고, 겨우 5개월밖에 안 됐는디도 지금도 곰발인디 앞으로 얼마나 더 클 줄 모르고.  나는 집도 없이 떠도는 사람이라, 글고 개 키우면 세도 안 줘요. 나이 들어 집도 없이 개 끌고 댕기면 사람들이 욕해.  더는 강아지한테 정 주고 싶지도 않고.”

“내가 일 나가는 현장에 깜순이를 데리고 갈 수 없어서요”

“어떤 생각 없는 놈이 제 몸 건사도 못 허는 사람에 개를 키우라고...”

“놈이 아니라 여자예요.”

“지랄허시지 말고 마당 있는 집에다 데려다줘요.”

나는 깜순이를 본 그날 풀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머릿속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일이 있었던 탓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나는 타고난 오지랖 때문에 어찌하지 못하고 지금 깜순이 물 주고 밥 주고 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싶은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져도 못 본 척 넘어가자고 수없이 다짐했었는데 다 소용없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큰 병이다. 누가 보면 나나 풀치나 오십 보 백 같아 보였을 것이다.      

나는 연자방아 기둥에 묶여 있는 자물통을 돌로 내리쳤다. 아무리 자물통을 이리저리 굴리고 뒤집어 돌로 쳤는데 비만 밧줄만큼  굵어졌다. 그래 자유가 그리 쉬우냐. 나는 깜순이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지인들한테 카톡을 보냈다.


“우리 집 앞에 사는 강아지인데 비를 쫄딱 맞고 생라면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연자방아에 묶어 놓았는데 주인 풀치는 어디 갔는지 찾을 길이 없네요. 강아지는 5개월 됐으며 정말 눈이 선해 보입니다. 풀치랑 살게 되면 굶어 죽을 수 있습니다.  후반기에 좋은 일 하시길 빌면서. 깜순이 이웃집에 사는 제가 이 글을 올립니다.” 단체 카톡 방에 글을 올렸다.

“자자, 여러분 깜순이도 한 말씀한답니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빗속에 새들이 날아갑니다. 새들이 부럽습니다. 저희 주인은 혼자 살기도 힘들면서 저를 여기 묶어 놓았어요.  제 털이 까매 무섭게 보이지만 사람을 물지 않고요. 저는 겁이 많아요. 그렇지만 집은 잘 지켜요, 애들하고도 잘 놀 수 있고요, 인사성도 밝아요. 친해지면 애교도 많아요. ”     

카톡을 보내는 동안 비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서 풀치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씩 입꼬리를 올리며 나타났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릴 줄 알았는데 연자방아를 지나 쌩 가버린다. 나는 몸을 피하려 했는데 풀치가 우비를 벗고 나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깜순이는 연자방아 쪽으로 엉덩이를 빼면서 앞발을 구부리고 앉았다.

“얼마나 애를 윽박지르고 팼으면 주인을 보고 몸을 뒤로 뺄까”

“내가 방에서 데리고 자는데요.”

‘니가 외로우니까 데꼬 자겠지.’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돌로 자물쇠 깨고 멀리 보내불라다 말았어요”

“그럼 안 돼요. 금방 보신탕 돼버려요.”

“목줄 매고 술보 주인하고 사는 것이 났겄어요? 차라리 주인 없이 떠도는 게 났겄오?”

흥분해서 풀치한테 막말을 해댔다.

“.....”

뭔 소리냐는 듯이 풀치가 나를 쳐다보았다. 깜순이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성길씨가 깜순이에게 물을 줬다고 풀치에 말했다. 풀치는 아무 말도 없이 물그릇을 성길 씨 마당에 갖다 놓았다. 풀치는 입을 다문 채 깜순이를 데리고 산책하듯 어두워지는 산길로 올라가 버렸다.

놀리기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카톡이 떴다,

“형부 왔어?”

“그래 깜순이 데꼬 산책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났을까. 풀치 옆에 깜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냐고 내가 물었다. 일 할 때 트럭 운전석 옆자리에 데리고 다녔는데, 잠시 주차한 틈을 타 스스로 탈출했다고 풀치가 힘없이 말했다.      

“깜순아! 어디서든 복날 잘 피하고 새처럼 맘대로 돌아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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