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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28. 2023

불량품들의 사계

노트북을 신문지로 덮었다  37

노트북을 신문지로 덮었다


     


나도 모르게 왼쪽 새끼손가락과 손목 아랫부분이 노트북 자판에 닿았다. 뭘 눌렀는지 삐 소리가 나더니 초기화면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내가 쓰던 화면이 사라져 버렸다. 난데없이 까마득히 잊었던 옛 사진 수십 장이 떴다.

“이건 또 뭐시여.”

십여 년 전 하남 외곽 검단산에 올랐을 때 찍었던 사진이다.

“옴매 글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양산대신 대형우산을 쓰고 다닐 정도로 뜨거운 한낮이다. 태양은 와글와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산에 살면서도 대낮이면 한두 차례 이상 샤워를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무슨 다이아몬드를 캐는 것도 아닌데 세 시간 넘게 노트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오늘은 태양을 머리에 이고서라도 빈 원고지 칸들을 메꾸고 싶었다. 하지만 써놓은 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돋보기를 극세사 헝겊으로 닦다가 다시 지판을 두드렸다. 이것저것 수없이 두드려봤다.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어느새 나무그림자가 희미해졌다.      

해가 졌는데도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선풍기 버튼을 강풍으로 돌렸다. 노트북을 일단 껐다 다시 켰다. 사진이 없어지고 내가 쓴 글 제목이 하늘색으로 떴다.

“야! 노트북 너 진짜 가지가지 헌다”

내 머리통을 아프게 쥐어박았다.

“그래 내가 잘하는 것이 뭐 있기는 있냐?”

그러나 커서를 쓰다만 문장에 갖다 대고 클릭을 해도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다.

“이 짱돌아! 어쩌다 이렇게 만들어 놨냐.”     

혼자 자책하면서 마우스를 몇 번이나 눌러봐도 옅은 하늘색 글자는 그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 너도 열받았다. 이거지.”

그럼 열 식히고 하자. 말 안 듣는 고양이 달래듯 나는 노트북을 살살 달랬다. 늦었으니 너도 자고 나도 자고 내일 보자.     


다음 날 오후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내가 글을 쓰던 곳에 마우스를 조심스럽게 갖다 대고 기다렸다. 짜잔 화면이 펼쳐졌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글을 써서 저장을 누르면 이미 같은 이름이 있다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라고 했다.

‘예’를 클릭하면 이미 저장돼 있는 이름이라고 뜬다.

 “내가 돌겄네. ”

누가 옆에 있으면 물어보면서 해결해 가겠는데 원, 이거 혼자 있으니 막히면 한 발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 컴퓨터 속 세상이다.     

써 놓은 글이 꽤 많은데 혹시 잘못 손댔다가 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끄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일단 자판을 다시 두드리고 봤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노트북과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있으니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 하고 자괴감만 커갔다.

나는 글을 쓰는 것보다 컴퓨터라는 괴물과 친해지는 것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쓴 글을 메일로 보낸다든지, 출력을 한다든지. 이런 일들이 시간과 공력이 더 들어간다.

“에라 모르겄다. 사법고시 공부하는 것도 아닌께.”     

눈꺼풀이 무거워져 노트북을 켜놓고 그대로 누웠다. 밤이라 컴퓨터 모니터 불빛이 상당히 밝아 신경이 쓰였다. 저러다가 다 날아가면 어떡하지? 걱정도 됐다. 벌떡 일어나 신문지로 모니터를 덮었다. 신문지를 덮어놓으니까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노트북도 나처럼 쉬었다 내일 하면 될지 모른다. 근거도 없이 막연한 기대를 해보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떴는데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아 밖이 어슴푸레했다. 맑은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켜고 나서 조심스럽게 컴퓨터로 다가가 신문을 걷었다. 분명히 저장을 눌렀는데 역시나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거의 포기 상태가 되었는데 갑자기 송파에 사는 심 총각이 떠올랐다. 본명이 홍섭인 그는 내가 방이동에 살 때 별명을 ‘심 총각’이라 붙여준 동생이었다. 노트북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심 총각한테 열심히 배워 집에 와서 혼자 하다가 종 쳐버린 적이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나중엔 너무 민망해서 컴퓨터 문제로 전화하기가 어려웠다.     

나랑 이 십 년가량 나이 차이가 나지만 제법 꿍짝이 맞는 술친구이기도 했는데 엉뚱하게 내가 붙여준 심 총각이란 별명을 상표로 등록하여 잘 다니던 라면회사를 그만두고 심총각 떡볶이를 급기야 온라인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심 총각 지가 아무리 바빠도 내 부탁은 들어 주겄지.”

맡겨 놓은 물건 찾으러 가듯 노트북을 싸 들고 잠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이때 내 이름 대신 핸드폰에 오지랖 별명을 저장해 놓은 번역회사 대표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지랖 뭐 해?”

“글을 썼는디 저장이 안 돼야. 그래서 날아가 버릴까 봐 신문지로 덮어놨어.”

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숨을 섞어 가며 털어놓았다.

“신문지로 덮어놨다고야. 기가 찬다. 기가 차.”

“응, 덮어놓으면 안 날아갈 것 같어서.”

“신문에 날 일이다.”

어쨌든 번역회사 대표인 친구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보따리를 다시 풀었다.


문제해결은 한마디로 초간단이었다. 기존 파일에 숫자 1자만 하나 더 써넣었다. 그러자 다른 이름의 파일로 저장이 완료되었다. 도대체 왜 이 간단한 것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일까? 그래 머리가 짱돌이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친구가 말했다. “야 그런데 이것 하나 못하면서 어떻게 그 복잡한 글을 몇천 장씩 쓰냐. 정말 너야말로 불가사의하다”     


내가 아는 지인은 운전 면허증을 딴지 이십 년 되었다. 여전히 장롱 속에서 곰팡이만 피우고 있다. 남편과 싸우고 한밤중에 열 식힐 곳을 찾는다. 그런데 택시도 안 잡히고 갈 때도 마땅찮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한 가지 다짐을 한다고 했다. 내일부터 당장 연수를 하리라. 그런데 남편과 화해를 하는 순간 운전 연수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내가 그와 같은 건 아닐까.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는 내 성격이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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