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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27. 2023

불량품들의 사계

성길씨 신들린 낫질 36

성길씨 신들린 낫질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한 손에는 에프킬라 다른 한 손에는 낫을 들고 아침 일찍부터 성길 씨가 밭에 나와 서 있다. 밭을 갈아엎을 태세다. 성길 씨 밭이나, 내 밭이나 산발한 미친년 같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잡초가 이곳저곳을 찌르고, 눕고, 뻗고, 삭아 내리고 있다. 저걸 어떡하나 엄두가 나질 않아 나는 모른 척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는 잡초에 본때를 보여줄 것처럼 낫을 들고 사뭇 비장하다. 나는 ‘황야의 무법자’에 깔리던 엔리오 모리꼬네의 배경음악을 낫든 성길 씨 배경에 깔아주고 싶었다.     

는 양쪽 끝이 말려 올라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에 등장하는 건맨이 술집 마당에서 결투할 때 쓰는 그 모자와 비슷한 것이었다.

‘건맨, 제발 잡초 좀 싹 날려 버려!’


나는 잡초들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픽픽 꼬꾸라지는 것을 상상했다. 얼룩무늬 군용 바지를 입고 고개로 텃밭의 좌우를 살피는 그에게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드디어 성길 씨가 손에 든 낫으로 잡초 넝쿨을 능숙하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구나. 그의 그림자에서 멋있는 건맨의 모습을 읽고 있었다. 텃밭의 그에게서 서부 영화의 건맨을 떠올리다니. 뒷집 김사장이 내 돈 들여서 집 고쳤다고 삼 개 월 치 집세 받지 말라고 했을 때 들은 척도 안 하는 사람이 집주인 성길 씨다.

‘아무리 텃밭의 잡초가 급하다고 워워! 이건 아니지.’ 나를 눌렀다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에프킬라를 목 주위에 사정없이 뿌렸다. 곧이어 낫과 에프킬라를 밭에 내려놓은 뒤, 손바닥으로 번갈아 가며 뒷목을 찰싹찰싹 때렸다. 나는 마루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입안에 머금고 있던 맹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아, 성길씨는 에프킬라로 모기와 결투를 하는 건맨이었구나. 허긴 모기나 총이나 쏜 것은 마찬가지니까’ 나의 황당한 공상과 상관없이 텃밭의 현실 속 주인공은 지금 손바닥으로 정신없이 모기를 잡고 있다.


토마토 이파리 밑에 모기가 정말 많다. 밭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순식간에 열댓 방은 물린다. 이곳 모기들은 얼마나 힘이 좋은지 입고 있는 바지를 가볍게 뚫어버린다. 성질 급한 나도 완전무장을 하지 않은 채로 들어갔다가 열댓 방 물리고 쫓겨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금세 엉덩이 여기저기에 방울토마토만 혹이 부풀어 올라 버린다.

모기에 물리면 가려워 환장할 지경이 된다. 특히 눈 위를 물리면 외출금지다. 버물리도 물파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눈두덩이에 솟아오른 혹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단 몇 분도 안 돼 ‘토마토 밭의 건맨 그의 폼’은 종 쳤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낫으로 사정없이 잡초들을 치고 나간다. 갈긴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오이 토마토 수박 참외 옥수수 케일 자주 색깔 깻잎 사이 잡초들을 닥치는 대로 쳐 나갔다. 성길 씨는 길고 지루했던 장마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듯 낫을 들고 춤을 췄다. 허공에서 고랑으로 풀과 농작물 검불이 넘나들었다. 신들린 무사 같았다. 낫으로 허공을 한 번씩 휘둘렀다. 아마 모기를 쫓는 것 같았다. 낫은 모기 쫓을라, 잡초 벨라, 쉴 사이 없이 타깃을 향해 날아다녔다. 워낙 낫질이 사납고 빨라 애먼 농작물이 날벼락을 맞았다. 토마토와 오이 가지 등이 적잖게 난도질을 당했다. 잘 익은 토마토가 아까웠다. 나는 외출 하려고 옷을 걸치고 나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사장님, 밭 정리 허요?”

“징그러워요, 그놈의 장마 때문에 뭔 놈의 장마가 두 달이나 계속되는지 원... ”

“장마 끝나먼 배추 모종 해야 되지요?”

나는 밭에 떨어진 토마토 주워 갈까요? 대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수박 참외랑 다 따 가세요.”

“예? 그럴께요.”

나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고민하다 구두만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지인들 줄 욕심에 과일들을 몽땅 차에 실었다. 성길씨 보다 내 얼굴에 땀이 더 줄줄 흘러내렸다.   

   

일주일 전 민자 미영 영순 영숙이 중학교 동창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다. 성길 씨는 주렁주렁 열린 참외 한 개를 안 따주고 인색하게 굴었다. 그때 영순이와 미영이가 평상에 앉아 “참외 맛있겄다”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생깠었다.

염병, 저러니까 장가 못 가는 거여. 눈치가 있어야지” 별명이 , '직진'인 민자가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성길씨가 내 친구들에게 인색한 사람으로 찍히는 것이 싫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웃에서 함께 사는 사람을 나는 흉을 봐도 남이 그러면 열받는 그런 심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내 남편도 애인 사이도 아닌데. 그럼? 이런 심리는 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냥 이웃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인지상정 정도라고 치자.     


오늘 그 친구들이 황반변성에 좋다는 아로니아를 나 준다고 문정동 커피숍 ‘썰스 데이’에 오기로 했다. 그래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친구들에게 주인아저씨가 따 주었다고 하께요.”

“아니 뭘 일부러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단순한 성길씨는 내 말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바짓가랑이를 걷고 범벅이 된 얼굴 땀을 대충 닦았다. 선크림이 흘러 눈 속으로 들어와 눈이 따가웠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즐거워할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엄격히 말하면 나를 위해서다.

마을버스 종점 고골 카페 사장님에게 들러 수박을 한 덩이 주었다. 부르릉 냅다 달려 커피숍에 도착했더니 친구들이 먼저 와 있었다.  

    

“성길 씨 올여름 땀이다. 느그들이 흉본 말을 들었는 갑서야.”

“우리 갔을 때 진즉 주지. 버스 떠났다고 해라

민자가 말했다.

“성길 씨 나이만 먹었지 아직 총각이어야. 부끄라서 말 못 헐 수도 있어.” 나는 성길 씨 역성을 들고 있었다.

“자기가 숫총각이냐? 장가를 못 갈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어야. 맨날 장가가고 싶다면서 우리 있을 때 참외나 수박 한 통 따 주면 누가 아냐? 중매라도 할지.”

“진도 너무 빼지 말어야.” 우리는 아이스커피 잔을 들고 웃었다.     

그나저나 성길씨는 밭을 정리는 했을까. 모기 물린 목덜미를 박박 긁고 있을까.

     

비는 오지 않았고 밭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양이들이 쓰러진 풀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고골 모기와 낫을 든 건맨의 ‘텃밭 결투’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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