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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Jan 17. 2024

불량품들의 사계

호박 골았다 53

호박 골았다 



         

막사 위 호박에 손을 갖다 댔다. 아이고 골았다. 잔머리 쓰다 똥 됐다.


조선호박이 막사 철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을 때가 엊그제 같다.    

여름에 혜숙 언니랑 선옥이가 놀러 왔었다. 우리는 백숙을 삶아 먹고 소화시킬 겸 마당에서 있다가 나는 호박이 궁금해 너럭바위로 올라갔다. 너럭바위 옆 막사 위에 호박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걸 보고 감격했다. 그 호박을 따서 비닐봉지에 싸서 혜숙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 집에 가다가 누구 주지 말고 꼭 언니가 가져가, 양파 썰고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넣어 된장국 끓여 먹어”

혜숙 언니는 내가 이삿날 잡아놓고 이삿짐 옮기기 전, 세탁기를 사서 배달시켰다. 앉은뱅이 의자에 발을 딛고 세탁물을 건져야 할 만큼 대용량이었다. 시내까지 이불빨래 들고 나오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호박이 세탁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첫 수확 호박이라 혜숙 언니에게 주고 싶었다.


봄에 호박 모종을 하려는데 내 밭은 오만가지 다 심어서 빈틈없었다. 그래서 막사 뒤에다 호박 모종을 심었다. 엄격히 따지면 막사 뒤는 내 영역이 아니다. 그날 호박 모종 하는 나를 성길씨가 보았다.  

“호박 크면 따다 먹을 쑈.”

“예.”

성길 씨 밭이니까. 내 영역을 벗어나 모종한 게 성길씨 눈에 내가 욕심 많은 사람처럼 비추어질 것 같아, 얼른 저 말이 튀어나왔었다.

성길씨 호박은 늙으면 죽 써먹는 호박이고, 내 호박은 조선 애호박이었다. 서로 다른 호박을 심었는데도 첫서리가 내리도록 성길 씨도 나도 서로 호박 하나 안 따 주었다. 성길씨는 자기 밭에 부추가 꽃피워도 내게 베어 먹으라고 할 줄 모른다.  

   

이제 호박도 종 칠 때가 되었다. 서리 맞은 꽃은 고개를 완전히 숙였다. 호박이 다 크기도 전에 이 사람 저 사람 따주던 호박도 끝물이다. 막사 위 손 안 닿는 곳에 호박 한 개가 다래 넝쿨과 이파리에 가려져 있다. 내 새끼처럼 내 눈에 잘도 보인다. 올해 마지막 하나뿐인 호박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봤다. 다른 작물 수확하는 것보다 호박 따서 친구들 갖다 주는 게 제일 행복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내가 친구들한테 호박 갖고 생색낼 수 있는 게 성길씨 땅 덕분이었다. 물론 나도 친구들이 가져온 과일과 음식을 성길씨에 주지 않았는가. 그건 그거고, 저걸 성길 씨 따줘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자고 나면 신세 진 사람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 일단 따놓고 누굴 줄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 평상서 보아도 어째 호박색이 누리끼리했다.

막사 앞으로 의자를 들고 갔다. 발을 딛고 올라섰다. 뒤꿈치를 들고 얼기설기 마른 줄기를 잡아당겼다. 겨우 손끝에 호박이 닿았다. 호박이 물컹거렸다.

‘어쩌까 골았네. 성길 씨 미안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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