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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Feb 17. 2024

불량품들의 사계

고양이와 바람과의 경계 68

고양이와 바람과의 경계



                         

새들 발자국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처마 밑까지 닥쳐오는 눈보라 때문에 눈을 감았다. 눈 속 다람쥐, 고라니들이 걱정되지만, 먹이를 줄 방법이 없다. 새들이라도 헤매지 말라고 눈 위에 수수쌀을 던져놓는다.


끄떡하면 수도가 언다. 얼지 않게 하려고 찬물을 틀어놓으면 온수가 얼고, 온수랑 찬물을 같이 틀어놓으면 보일러가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면서 에러가 뜬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추위다. 자의든 타의든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것들이 걱정이다.

‘조금 더 영리하게 살 것을...’

때늦은 후회는 지금 나에게 아무 쓰잘떼기 없다. 잊은 줄 알았던 분노와 부끄러움이 겨울만 되면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내가 추위에 약해서 그런가? 풍선처럼 부푼 머리에서 열이 나 터지기 직전이다.    

  

벌써 초저녁이다. 눈보라 치는 소리가 방안까지 치고 들어온다. 고양이 까불이가 의자로 올라와 내 옆에 앉는다. ‘니 집 놔두고 왜 자꾸 오는 거야?’ 하면서도 나는 까불이를 은근히 반긴다. 까불이도 그걸 알고 있다. 녀석을 밀치지 않고 참치를 사료에 섞어 주었다.


며칠 전 성호 오라버니 부부와 저녁을 먹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그들을 볼 때마다 부럽다. 내가 송파에서 가게 할 때도 크리스마스나 명절 전날 나 혼자 외롭지 않을까, 걱정되어 꼭 가게에 들르던 부부였다.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지만, 지금은 마음뿐이다.

눈 속에서 김장독에 묻은 배추김치를 꺼내와 폭탄주를 곁들여 닭백숙을 먹었다. 오라버니가 식사를 마친 후 말했다.

 “뭐 하려고 이 고생을 해? 사는 게 거기서 거기여.”

갑자기 누군가 맞은편에 앉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을 때 왜 성호 오라버니 목소리가 떠올랐을까.     

까불이가 의자에서 세수하듯 그루밍을 한다. 설거지를 끝내고 라디오를 켰다. 난방 텐트로 들어갔다. 극세사 이불을 끌어다 얼굴을 감싸고 노래를 들어도 움직일 때 그때뿐이다. 웃풍은 귓불기를 훑은 뒤 온 방을 휘젓는다.

난방 텐트 안으로 찬바람이 끈질기게 파고 들어온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숨이 막혔다. 얼굴을 내놨다. 그새를 못 참고 찬바람이 또 내 볼을 할퀸다.      


까불이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살금살금 내 옆에 엉덩이를 대고 엎어져 있다. 나비랑 나랑은 며칠 전 서로 선을 지키기로 약속을 했다. 물론 나의 일방적 약속이지만, 그래서 매트로는 올라오지 못하게 발로 밀어냈다. 까불이는 연탄창고에서 구르다가 성길씨 보일러실에서 배 깔고 누워있다가 내 방에 들어온다. 더러운 까불이는 거실에만 있는 것으로 나의 일방적 조치를 지키기로 했다.     


보일러는 방 안 온도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여전히 11도에서 멈춰있다. 처음에는 보일러가 고장 났나? “바깥 온도가 워낙 추워 그런 거 같아요” 서비스 센터 상담 직원이 말했다.

     

수돗물이 얼어버릴까, 졸졸 수돗물을 틀었다. 엎어놓은 그릇 위로 수돗물이 튀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어느새 발밑에서 낮고 깊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의 경계는 희미해져 버렸다. 나비를 껴안았다. 이마를 갖다 대고 내 울대를 누르면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비 눈이 휘둥그레졌다. 까불이는 엉덩이와 고개를 돌렸다.

까불이와 밤새 눈이 그치는 줄 모르고 놀았다. 새벽이 되자 나비는 잠이 들고 나는 문을 헤 짚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뜬 눈으로 날 밤을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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