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안의 사람들

버스 안에 담긴 삶들

by 카이로스

프롤로그

정말이지 오랜만에 버스에 올랐다. 오랜만의 여유의 순간이었고, 창밖의 모습에 때때로 평안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명상과 같은 순간, 눈부시게 맑은 날 아지랑이 피듯 햇볕을 타고 방안에 번지는 먼지와 같이 지난 기억들을 소환했다.


1. 어느 봄 아침 9시

떠밀리 듯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목적지로 사라진 버스 안의 공기는 그 자유로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창 밖의 싱그러움이 하나 둘 눈에 속속 들어오고, 기사님은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버스의 목적지가 당신을 부드럽게 당겨주는 것 같은 편안함이 다가오는 순간일 듯싶다. 연둣빛 풍경을 앞문을 통해 힘껏 빨아들이는 순간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마도 대학생일 듯한 학생이 두꺼운 책을 왼손에 쥔 채 들어온다. 학생의 손과 5월의 햇살은 손이라도 맞잡은 듯 버스 안 공기의 자유로움을 더한다. 버스가 하늘로 둥실 떠올라 풍선처럼 날아가기라도 할 듯하다. 그렇게 봄날의 늦은 아침은 한 없는 여유로움을 선물해 주곤 한다.


대학교 때 난 늦은 등교가 너무 좋았다. 평화롭게 조용한 버스를 타고 거의 한쪽 종점에서 반대쪽 종점으로 달려가는 선을 그리다 보면, 창밖의 풍경이 그 위에 더해졌다. 국민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친구 집으로 놀러 가는 길에서 매번 우리를 유혹하던 떡볶이집, 우리 집에선 코 앞이었던 학교를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중학교 친구의 집으로 놀러 가던 언덕길,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지금은 없어진 작은 극장자리, 부모님과 동생과 같이 자전거를 타러 갔던 지금은 공원이 된 광장을 지나면, 내 인생에 속해 있지 않았던 풍경들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대학생임을 느끼게 해 주던 거리가 들어왔다. 신입생 때 낯설던 그 두근거림은 어머니 뱃속에서의 시작과는 다른 나 스스로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두려운 기대감이었다.


이내 학년이 올라가며 길 위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 가듯, 나의 20대의 기대감은 시간이 가며 '자신감'으로 영글어 갔다.


2. 한 여름 오후 6시

뜨거운 태양은 아직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아쉬움이 있나 보다. 이내 한낮의 열정을 잠시 쉬어가는 아량을 베풀었지만 버스를 기다리다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직장인들에게는 버겁다. 그들의 뜨거움은 이미 아침부터 식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새벽부터 떠밀리 듯 나온 이들은 동질감을 가진 다른 이들과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듯 춤을 췄을 것이다. 마리오네트와 같이 누군가에게 조종을 받는 듯한 모습으로... 아마 회사 안에서도 예상치 못한 혹은 예상이상의 파도에 여기저기로 떠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조금 일찍 서핑을 배웠을 걸 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다른 이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노련한 관성으로.. 이내 곧 자신만의 모습으로 하루를 달래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은 모습대로, 서 있는 모습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버스 안의 시원한 에어컨이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선물해 주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번지는 노을에 태양은 이내 모습을 감추고, 마음의 평화가 다가온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화기를 통해 스멀스멀 올라온다. 도착하기에 아직은 먼 거리이지만 이 길 끝에 다시 만날 가족이, 친구들이, 혹은 나만의 보상이 어느새 시원해진 몸과 함께 기분 좋은 상상을 만들어 주나 보다. 잊은 줄 알았던 30~40대의 기대감은 평온한 '위로'였다.


3. 10월의 가을 새벽 5시

첫 차가 차고지를 이제 막 빠져나왔다. 차고지에서 이미 버스에 오르셨던 분들을 포함에 새벽을 맞이하는 분들은 대부분 지긋한 나이의 아주머님과 아저씨들이다. 새벽 공기의 상쾌함은 없다. 단단히 차려입으신 모습에서 추위만 느껴진다. 버스의 히터가 몸을 데워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 아주머님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가끔 가로등이 보이기도 하고, 시내에 들어서자 제법 밝은 빛들이 눈 안으로 들어오지만 당신의 깊은 눈만큼이나 까마득히 알 수 없는 표정이다. 확실한 것은 버스 안에 번져가는 고단 함이다.


반평생 이상을 살아온 그분들도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유년과 학창 시절이, 풋풋했던 연애시절이, 아이를 품에 처음 안은 순간이, 자녀들의 성장의 파노라마를 품고 있을 것이다. 차창 거울에 비추인 아주머님의 모습은 아직 변화가 없었다. 구석진 차고지에서부터 목적지까지의 긴 거리처럼 아직 달려가야 하실 여정이 힘들어 보이셨다.


1시간 넘게 달려온 지금. 태양이 이마를 내밀며 자신의 늦은 하루의 시작을 빨갛게 부끄러워했다. 그 순간 마법과 같이 아주머님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드리웠다. 부끄러워하는 태양의 모습이 귀엽기라도 하신 듯이 홍조가 띄어지는 듯했다. 빛으로 인한 착시 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어오지만 과감하게 단정했다. 그동안의 좋았던 시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힘들었던 시간들을 매번 이겨내셨던 경험자들이기에 오늘 하루도 즐길 수 있다는 여유로 하루를 무장하시는 것 같았다. 아직은 겪어 보지 못한 50~60대의 기대감은 '다짐'인 듯하다.


4. 겨울,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12시

1차선의 버스 전용도로를 이제 막 나와 4차선에 늘어서있는 정류장들에 하나하나 인사를 하는 1년의 마지막 날이다. 성경을 들고 서둘러 내리시는 사람들,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 작은 케이크를 무릎에 올려놓고 반짝이는 트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앞문이 열릴 때 가끔씩 들려오는 구세군의 종소리와 어우러져 추운 날씨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들은 따뜻함을 더해 준다. 그 따스함은 버스에 오를 각자의 모습으로 번져간다.


얼마 있으면 곧 울린 보신각을 뒤로하고 달리며 생각했다. 꺾인 40대로서, 나도 이제 다짐과 같은 기대감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일 년이 마무리되는 큰 순간이지만, 동시에 하루가 바뀌는 것뿐이다. 또 하나의 거창한 Resolution도 품겠지만 굳건히 만든 하루하루의 Routine을 지켜가며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보신각이 울릴 때는 보다 나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1년을 위로이며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 대한 다짐을 했다.


순간 지긋히 나이를 드신 백발의 할아버님들이 들어오셨다. 늦은 시간 편안히 택시를 타고 귀가하시기에는 같이 나눌 이야기들이 많이 남으신 듯했다. 역시나 내 앞자리에 앉으신 두 분은 말씀을 이어 가셨다. 이야기 속에는 새해를 맞아 그동안의 삶에 대한 위로나 앞으로의 다짐은 없었다. 정말 최소한의 바람뿐이었다. 재밌었던 것은 자손들의 건강을 말씀하시면서 역설적으로 본인들은 먼저 가신 할머님을 만나길 소망하시고 계셨다. 인생의 좌절이나 고단함은 아니었다. 수십 년을 지내온 깨달음과 같았다. 당신들의 기대함은 담담한 '내려놓음'이셨다.


에필로그

대부분의 우리의 삶이 틀에 박힌 좁은 공간에 갇혀 있지만, 그 안의 많은 모습들이 사계절 내내 나의 기대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자신감, 위로, 다짐, 내려놓음으로 변화하며 평생에 행복함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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