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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레나 Feb 10. 2022

미국 안의 작은 한국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지만 그 안의 작은 한국이란 마을

LA에 있는 코리아타운을 들어본 적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많은 도시 중 LA에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그 도시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도시 중심에 크지만 작은 한국 타운을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나의 첫 LA에 대한 인상이 기억에 나는데 도심으로 들어오면서 Korea Town이라는 사인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어로 돼있는 간판들이 계속해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미용실, 백화점, 당구장, 노래방, 은행 등 정말 많은 한국말로 된 간판들이 보였으며 주변 마트에 들러서 물건을 사러 갔을 때에도 '계산해드릴까요?'라고 한국어로 물어보는 직원에 신기하기도 하고 미국에 와서 처음 겪는 경험에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진 곳이 LA 코리아타운이지만 어느 도시에 있든 한인들이 다 많이 살고 있고 그 안에서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라스베이거스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LA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생각보다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고 한인 커뮤니티가 꽤 큰 편이다. 처음에 왔을 때는 아는 사람도 없고 잘 알지 못했으나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면서 한인사회가 미국에 많이 자리 잡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 나는 한인 커뮤니티가 넒 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내가 아직 미국 사회에 바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었고 그전에 많은 정보를 공유해서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 특히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타지에 나와서 힘들게 고생도 하고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마음이 똑같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끈끈하게 뭉치기도 하고 처음 미국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도와주려고 하는 등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도 이민으로 온 지 많은 시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처음 온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처음에 와서 고생을 하기도 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같은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이 사람들도 나에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도시마다 다음이나 네이버에 한인 커뮤니티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서 구인구직을 하기도 하고 서로 사용했던 물건을 팔거나 사기도 한다. 물론 유학생들이나 잠깐 비즈니스 차 온 사람들을 위해서 집 렌트를 올리기도 한다. 나 역시도 처음 미국에서 자리 잡을 때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일을 찾기 위해 몇 군대 추려서 인터뷰를 보러 다니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한 명씩 한 명씩 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 많아지면서 한 켠으로는 한국인의 정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 켠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도 처음과 다르게 되었다. 처음에 나에게 해주었던 호의와 배려는 나중에 나에게는 '내가 너에게 이것을 해주었으니 너도 이 정도는 참아줄 수 있지 않아?' 하는 말과 돌아왔고 그것의 나의 발목을 잡는 이유가 되었다.


미국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처음부터 자리를 잘 잡고 무난하게 살아온 사람과 반면에, 한국에서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도피하듯이 와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 잘 성공해서 나의 삶에 감사하며 사람도 있지만 그중 몇은 그렇게 살아온 삶이 버릇이 돼서 남이 자기보다 조금 더 잘 되는 걸 못 보고 자신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정말 신기했다. 한인사회가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너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한국인이라는 이방인이 한인사회를 멀리하기는 사실 힘들다. 이미 버릇처럼 한국음식을 찾고 먹고 싶고 하듯이 한국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심리라고 할까.


나는 작년 우연히 알게 된 가게 사장님께서 열심히 하시던 비즈니스를 접고 한국으로 갈지 고민하시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장님께서는 처음에 가게를 오픈하고 아침 6시부터 오픈 준비를 하시고 사업차 가는데만 5시간이 걸리는 LA를 왕복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시는 모습을 봐왔어서 그 누구보다 더 놀랐었다. 같이 투자를 하기로 한 사람이 투자비용을 사기를 쳐서 가게가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한인들 사이에서는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인이 했으면 더 한다고 제대로 알아보고 하자' 그저 한인 사회에서 사람을 보는 눈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 번의 실패로 일어나기 힘들지만 미국의 경우 타지에서 실패를 맛보고 일어나기도 큰 도전이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있다. 그들의 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다독이면서 남들에게 주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20살 때부터 독립을 해서 살던 버릇 때문인지 내가 힘든 일이 있거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님께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나의 그런 점을 굉징히 싫어하신다. 하지만 걱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바람으로 시작된 마음이었으나 이게 점차 시간이 흘러서는 버릇으로 되어버렸다.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정말 힘들 일이 있으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똑같이 일을 하고 와서 저녁을 먹으려고 저녁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지금 당장 억울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러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담아두던 게 갑자기 터져버려서 눈물이 미친 듯이 나오는 것이었다. 난 핸드폰을 들고 부모님 전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취소를 하고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은 그저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거 같다. 그렇게 나의 하루 일과를 이야기를 해주고 조용히 듣고 있는 친구는 나를 다독여주었다.



타지에서 만나는 '작은 한국'이 주는 달콤함과 편안함에 취해 오래도록 있다가 불이익이나 부당함을 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호의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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