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 이 글은 22년 전에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용케 옛날 파일에서 찾아서 올립니다---
“여보세요”
“나야 엄마 별일 없어요”
어머니와 내가 매일 하는 전화통화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 하는 전화가 아니니 통화시간은 길어야 1분 남짓이다. 이런 식의 안부전화를 시작한 지 2년이 다됐다.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들 두 명을 군대 보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 언제나 부지런하고 강한 여성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던 어머니가 2년 전부터 앓은 우울증으로 눈물바람이 잦은 심약하고 허약한 할머니가 다되셨다.
부잣집 큰딸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던 어머니는 12살 때 6.25 전쟁을 맞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두 여의고 외증조할머니 밑에서 6살의 나이 어린 이모와 모진 풍파를 헤치며 살아오셨다. 일제 때 사회주의 계열에서 항일운동을 하시던 외할아버지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시다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보도연맹사건으로 불리는 정부의 좌익척결 방침으로 총살형을 당하셨고 외할머니도 그 와중에서 세상을 뜨셨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연로하신 외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이모를 돌봐야 하는 사실상 소녀가장역할을 하신 것이다. 12살의 소녀가장이 전쟁의 혼란을 헤치고 살아간다는 것은 험한 강물에 내던져진 종이배와 같은 처지였다. 밀림에서 죽은 짐승의 시체를 먹기 위해 달려든 하이에나무리, 독수리 떼와 다를 바 없이 굶주린 사람들과 욕심에 눈먼 사람들에 의하여 곡간은 점점 비어 갔던 것이다. 전쟁은 어머니로부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뿐만 아니라 만석꾼살림 그리고 소중한 한 소녀의 꿈을 차례로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12살 소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전쟁의 상처였으나 어머니는 훌륭하게 이겨내셨다.
그 후 가난한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였고 2남 2녀를 낳아서 길렀지만 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 명의 시누이와 네 명의 시동생을 시집장가보내며 살아가기란 하루하루가 삶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었으니, 이것이 어머니인생의 두 번째 전쟁이었으리라. 바로 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쟁은 어머니로부터 젊음과 어머니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 째 빼앗아 가버렸다. 가끔씩 그 당시 얘기를 묻노라면 어머니는 "그땐 힘든 줄 몰랐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호사스럽게 느껴지던 때였을 것이다.
이렇게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고통 속에서도 눈물 한번 보이지 않으셨으니 나는 우리 어머니가 6.25 전쟁 중에 겪은 험한 경험 때문에 눈물이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누구보다 꿋꿋하게 시동생들 건사하며 자식들 키워내셨으니 내 기억 속에는 항상 강하고 감정의 기복이 없는 어머니로만 남아있었다.
이제 시동생들 그리고 어머니가 낳아서 길렀던 2남 2녀의 자식들마저 결혼하고 독립하였으니, 어머니는 당신의 역할이 다 끝났다고 여기시는 듯하다. 두 번의 전쟁으로 얼룩진 지난 50년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그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울증을 앓고 계신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이제야 생각나신단다. 전쟁과 그로 인한 집안의 몰락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사실도 이제야 가슴이 아프단다. 그리고 6.25 전쟁 후 생존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지난 50여 년의 세월이 이제야 가슴저리게 느껴진단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인생이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어떤 위로의 말도 어머니께는 별로 효과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보니 어머니는 지금 당신 인생에서 세 번째 전쟁을 치르는 중인 것이다. 자신과의 전쟁, 허무와의 전쟁, 우울증과의 전쟁이다.
아! 우리 어머니 평생을 전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시는 우리 어머니. 그렇지만 나는 믿는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번 전쟁도 꼭 이겨내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