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작은형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작은형으로부터 배우는 지혜

by 할슈타트

1980년, 중학교 2학년이던 해였습니다. 부마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이후, 집안의 중심이던 큰형의 부재는 우리 가족에게 큰 그늘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묵묵히 메운 사람이 작은형이었습니다. 형은 야간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사관학교에 지원해 하사로 군 복무를 시작했고, 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어느 정도 군 생활에 적응한 중사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낼 때, 저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일찍 깨닫고 철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 실컷 놀았으니 이제는 공부해야 할 차례였는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모님은 늘 바닷일이나 밭일로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집은 조용했고, 제 몫은 제 스스로 챙겨야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월말고사라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전 과목 평균 85점 이상이면 전교생 조회 시간에 우수 학생으로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상장 때문이 아니라, 형에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게 있는 것은 교과서뿐이었습니다. 참고서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고, 부모님께 말을 꺼낼 용기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생활통지표에 ‘수업 시간에 필요한 도구를 잘 챙겨 올 것’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의견이 적혀 있던 아이였으니, 공부 환경이 넉넉했을 리 없습니다.


중학교 2학년, 체육과 영어를 가르치던 담임선생님의 영어 수업은 유난히 재미있었습니다. 문법이 또렷하게 이해되었고 문장이 잘 외워졌습니다. 수학과 과학도 어느 순간 흥미로운 과목이 되었습니다. 다른 과목들은 세 번쯤 정독하면 시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3월 월말고사를 맞이했습니다. 첫 시간 시험지를 받던 떨림, 마지막 시간까지 무사히 마쳤을 때의 안도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평균 92점, 전교 6등(299명). 1학년 때 70~80등을 오가던 저로서는 믿기 어려운 성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작은형에게 편지로 알렸더니, 얼마 뒤 카세트 겸용 라디오가 소포로 도착했습니다. 동네 친구들 누구에게도 없던 물건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노래를 녹음해 함께 듣던 그 시간은 제게 세상을 넓혀 준 창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더 좋은 선물과 용돈을 받고 싶은 단순한 마음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전교 2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군용 건빵과 라면을 보내주어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도 아직 따뜻합니다.


돌아보면, 제가 공부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큰형의 부재가 남긴 상실감, 부모님의 가난, 그리고 작은형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집안을 돕던 장남의 빈자리는 컸습니다. 그 무게가 작은형의 군 생활에 부담이 되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일곱 남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입학을 앞두었을 때, 형은 치아 관리를 잘해야 한다며 일주일 동안 치과 치료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임플란트 하나 없이 제 치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사가 되어 첫 발령을 받기 전, 신혼살림으로 빠듯했을 형이 당시 유행하던 소형 워크맨을 사주었습니다. 그 작은 기계 속 음악은 저의 청춘을 동행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저는 늘 받기만 한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부사관 의무복무를 마친 뒤 공채로 공항관리공단에 들어갔다가, 다시 시험을 치러 철도청, 지금의 철도공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0여 년을 성실히 복무하고 지방 역장으로 퇴임하신 것을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큰형이 제 삶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작은형은 저를 실제로 움직이게 한 실행의 후견인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를 휴학하고 시골에서 머뭇거리던 저에게 지방 국립사범대 원서를 사 들고 와 “한번 지원해 보라”고 권한 사람이 형이었습니다. 그 원서 한 장이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그 선택 덕분에 저는 부부 교사가 되었고, 33년간 학생들과 함께하며 가난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두 아들을 독립시키고, 지금은 스스로 명퇴하여 또 다른 배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형님, 여유가 되시면 수원에 한 번 오십시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융건릉을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강화도나 속초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나누고, 형이 군 복무했던 파주에도 함께 가본다면 감회가 새로울 것입니다.


저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네 형제가 함께 북해도의 봄을 걷는 일입니다. 꽃이 피는 길 위에서 지난 세월을 천천히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도 퇴직 후 일을 이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늘 조심하시고 건강을 살펴주십시오. 형수님께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꼭 묻고 싶습니다. 형님의 젊은 날 꿈은 무엇이었는지요.


여전히 많이 배우는 동생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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