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잘 와서 고마워~
나의 쉰아홉 해 삶은 분명히 둘로 나뉜다. 결혼 전과 결혼 후다. 결혼 전의 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우리 집에는 논이 없었다. 밭도 고구마밭이 전부였다. 쌀밥은 특별한 날에나 가능했고, 보리밥도 감지덕지였다. 그래도 고구마를 섞은 보리밥만은 먹고 싶지 않았다. 가난은 식탁 위에서도 늘 선택지를 지워 갔다.
학창 시절의 구체적인 사연은 이미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쓴 편지 속에 담아 두었다. 이 글에서는 다시 꺼내지 않으려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결혼 전까지 나의 삶은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집안의 빚을 갚는 일이었다. 교사로 발령을 받은 뒤에도 월급의 대부분은 그곳으로 향했다. 돈은 손에 머물지 않고 늘 지나가기만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은 돈을 빌리고 갚는 일을 반복했다. 마감 날이 다가오면 며칠만 미뤄 달라는 사정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끔 큰소리가 났다. 나는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싫어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침에 들리는 까치 울음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쌀 항아리 바닥을 긁는 소리다. 까치는 채권자가 찾아온다는 신호였고, 항아리 바닥 소리는 쌀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두 소리는 가난의 얼굴이었다.
나는 학생이었다. 상황을 바꿀 힘은 없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대학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등록금을 대 줄 사람은 없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삼 할 남짓이었다. 시골에서는 더 낮았다. 우리 동네에서도 대학에 간 아이는 손에 꼽았다. 스무 명 중 세 명 정도였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 나 역시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 큰형의 설득으로 학력고사 성적에 맞춰 부산대에 진학했다. 85학번이었다. 당시에는 전국 10대 대학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큰형은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큰형 집에서 버스를 갈아타며 한 달 남짓 통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시골로 내려왔다. 휴학 처리는 작은형이 대신해 주었다.
그해 다시 시험을 봤다. 논술고사가 추가된 학력고사였다. 지방 국립 사범대에 86학번으로 입학했다. 그곳에서도 마음은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1학년 내내 방황했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긴 머리의 소녀를 만났다. 지금의 아내다. 우리는 한 달에 두세 번 편지를 주고받았다. 공부할 이유가 생겼다. 삶이 조금씩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졸업하자마자 교사가 되었다. 2년 뒤, 편지의 주인은 아내가 되었다. 결혼 이후 내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가난한 사람에서 부자가 되어 갔다. 여기서 말하는 부는 돈만을 뜻하지 않는다. 안정과 관계, 그리고 함께 견디는 힘이었다. 결국 아내가 나를 가난에서 건져 올렸다.
두 아들이 태어났다. 삼십삼 년의 교직 생활과 결혼 생활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잘 왔다. 삼 년 전, 나는 스스로 교직을 마무리했다. 지금은 그 시간을 지렛대 삼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제 집에는 둘만 남았다. 두 아들은 각자의 둥지를 꾸리고 독립했다. 가끔 전해 오는 소식은 대체로 기쁘다.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오래 지난 일이기에 이제야 밝힌다. 결혼 후 오륙 년쯤 지났을 때, 아내 몰래 방과 후 수업으로 번 돈을 부모님께 드린 적이 있었다. 용돈이라기보다는 농가 부채의 이자에 보태고 싶었다. 아내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천만 원에 이르던 농가 부채가 한순간에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일을 한 사람은 가족이었다. 큰형이었다. IMF 이후 형편이 나아진 큰형이 빚을 모두 갚아 주었고, 논도 두 마지기 사 주었다. 그날 아버지가 기뻐하던 얼굴을 나는 처음 보았다.
가난은 내 젊은 시절을 지배한 가장 큰 짐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은 단순했다. 돈을 벌어 우리 마을 논 오십 마지기를 사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럴 돈이 있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논으로 가난을 이기고, 스스로에게 보상하고 싶었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스스로를 터널 속에 가두고 혼자 지내는 아이였다. 그래서 깊게 사귄 친구는 거의 없다. 동창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대신 교직과 결혼생활이 나를 바꾸었다. 학교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가정에서 삶을 통찰하는 눈을 얻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가난에서 출발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는 세 번 포기했고, 그때마다 새로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내려놓았다. 고입 시험을 위해서였다. 부산대를 포기하고 지방사범대를 선택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감 승진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 잘한 선택이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쉰아홉 해를 여기까지 버텨 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잘 살아낼 것이다. 오늘의 나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부모님, 형과 누나, 동생, 장인과 장모님, 아들들과 손자, 처가 식구, 친구들, 제자들에게도 감사한다. 끝으로 무엇보다 나를 가난에서 구해 준 아내에게 깊이 감사한다.
가난한 시골 소년,
너와 함께 살아와서 고맙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