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엄마, 저는 쌀독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싫었습니다

쌀독 바닥을 긁는 소리를 기억하시나요?

by 할슈타트

제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뒤로 엄마는 늘 바빴습니다. 가난은 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로 늘 어깨를 눌렀겠지요. 바다에서는 고둥을 주웠고, 산에서는 산나물을 캤습니다. 텃밭에서는 가지와 호박을 땄습니다.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시장에 다녀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물건을 팔고 과일과 생선을 사 들고 돌아오셨지요. 장사의 신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는 나름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70, 80년대 시골에서는 공부보다 농사가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벼농사를 지을 논이 없었습니다. 농번기 휴업일에도 저는 공부 말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벼를 베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닙니다. 요즘 부모들처럼 공부하라거나 무엇이 되라고 하지 않으셔서 그 점은 좋았습니다.


엄마, 기억하시나요.

중학교 2학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방과 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평소에 십 리 길을 걸어 통학했기에 우산도, 버스 요금도 없었습니다. 비가 오면 버스를 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요금은 20원이었습니다.


친구에게 빌려 버스를 타면 됐습니다.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빌리는 일이 싫었습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비를 맞으며 뛰고 걷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젖은 가방과 책을 마루에 펼쳐 말렸습니다. 저녁이 되어 바다에서 고둥을 주워 돌아온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나 된 놈이 단돈 20원을 빌리지 못하고 비를 맞고 뛰어왔냐?”


그 뒤에 바보, 멍청이 같은 말을 더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도 고백했듯이, 저는 또래 친구들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가 부끄러웠습니다. 참 철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엄마 밥을 가장 많이 먹은 자식이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집밥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집안 형편을 가장 잘 아는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집에는 쌀을 보관하는 스무 리터쯤 되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쌀이 가득할 때는 바닥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도 함께 차올랐습니다.


쌀이 줄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바가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어느 날, 쌀이 완전히 떨어졌습니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몸속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엄마의 마음은 더 아팠겠지요.

그 가난을 딛고 사는 지금의 저는 행복한 어른입니다.


2000년, 밀레니엄 무렵이었습니다. 장남의 노력과 지원으로 집안의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엄마는 노년에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일곱 남매를 보며 행복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엄마,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의 아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는 더 따뜻하고 말 많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시골집에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준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편지의 답장은 다음 세상에서 꼭 해주십시오.


“엄마, 말수 적은 셋째 아들이 많이 사랑했습니다.

다음 생에는 많이 안아보고 싶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을 소풍 전날처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셋째 아들이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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