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1988년 오스트리아 린츠
20살의 율리나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나 린츠에서 자란 그야말로 린츠 토박이인 그녀는, 별 고민 없이 부모님처럼 공장에 취직한 동기들과 달리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었기에 진로결정에 진전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친구라 할 사람이 없었다. 있다면 아버지와 아기 강아지 알렉스뿐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5살일 때 헤어졌다. 아버지는 요리사라 잦은 야근에,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출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진 요리를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 했음에도, 어머 니는 도대체 언제냐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 우릴 떠났다. 그녀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자주 울었고, 매일 술을 마셨다. 도시에서 깡촌으로 와 받았을 문화충격에, 아는 사람도 없는 타지생활, 갑자기 생긴 아이를 남편 도움 없이 혼자 키워야 하는 버거움을 율리나는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부재를 납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는지, 율리나는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데에,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어느 날은 부스스한 긴 금발 머리카락을 빗느라 학교에 늦고, 다른 날에는 배가 아파 지각했다. 자주 깜빡해서 메모를 열심히 했지만, 그 메모를 어디 두었는지 잊거나, 몇 페이지에 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꾸중을 들었고, 학급 아이들의 비웃음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요리사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떠날 때 한 말을 보면, 아마 요리를 관두겠다고 꽤 자주 오래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요리를 관두지 못한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대단한 요리사도 아니었다. 동네 오래된 식당에서 주방장을 맡고 있었지만, 슈니첼이나 감자퓌레, 슈페츨레, 적양배추샐러드 같은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편안하고 익숙한 음식을 했다. 멋은 없지만 맛은 있었다. 집에 밥이 없을 때면 아버지가 있는 주방에 가서 직원식을 먹곤 했다.
‘그래. 요리사가 돼야겠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연민이 컸기에 아버지를 따라 요리사가 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장 취직 외에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길이 요리사였을 뿐이다.
율리나는 학교와 현장실습을 병행하는 직업교육 과정을 신청했고, 이 작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 니벨룽겐 다리 옆에 있는 강변식당 라르고에 교육생으로 취업했다. 라르고는 느리게라는 뜻으로 강변에서 여유롭게 아름다운 음식을 즐기는 콘셉트의, 지역에선 꽤 알려진 식당이었다. 요리사가 되더라도 아버지처럼 투박한 요리를 하고 싶진 않아 고른 식당이었다. 식당의 요리사들은 젊고 야망이 있었다. 위계질서는 명확했고, 엄격했다. 주방은 불과 칼이 있는 곳이라 자칫하면 크게 다치기 쉬웠기 때문이다.
첫날, 조식 서비스를 위해 6시까지 출근해야 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누런색의 2량짜리 1번 트램을 탔다. 트램이 평소보다 늦어 그녀는 빨리 걸어야 했다. 10분 거리를 7분 만에 주파했고, 식당에는 6시 정각에 도착했다. 평소 운동이랑 담쌓고 사는 그녀에게 3분 단축은 큰 성취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랑스레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가 활기차게 주방장에게 인사했지만 돌아온 건 질책이었다.
“첫날부터 지각이네. 6시 출근이라고 했는데?”
“6시에 도착했는데요?”
“옷 갈아입고 손 씻고 주방에서 일 시작하는 시간이 6시라는 거야.”
‘6시 출근이면 6시까지 오라는 거지. 꼰대. 그리고 트램 기사가 늦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럼에도 사과는 했다. 아침이라 그녀의 하얀 얼굴에 덮인 주근깨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부스스한 금빛 머리를 나풀거리며 손을 닦았다.
“머리 묶고.”
율리나는 안 가져온 머리끈을 주머니에서 찾는 척해본다. 주방장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쿠킹랩을 길게 잘라 돌돌 말아 건넸다. 율리나는 인상을 쓰고 눈을 껌뻑거렸다. 비닐랩으로 어쩌라는 것인지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작게 한번 치고는 비닐랩을 끈 삼아 어떻게든 머리를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