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8년, 30km

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by 어쩌다보니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2001년 3월 21일 독일 만하임


골동품 상인 마누엘 볼프람이 살해당했다. 사인은 교살. 자택 현관에서 뒤따라 들어온 범인에게 살해당했다. 지갑에는 카드만 남아 있고 현금이 없었으며, 집 안을 뒤진 흔적, 서류뭉치와 옷가지, 책, 잡동사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전형적인 강도살해 현장의 모습이었다. 시신의 옆에는 범행도구를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덩굴 식물을 고정하는 정원용 끈이 놓여 있었다. 만하임 경찰서는 구조요원들의 도움으로 시신을 조심스레 옮겼다. 타이벡 방호복을 입은 과학수사대원들이 우주인처럼 뒤뚱뒤뚱 걸어와 조심스레 증거자료를 수집했다. 정원용 끈을 비롯해 바닥의 머리카락들, 집을 뒤지는 과정에서 손이 닿았을 모든 부분들의 DNA를 채취해 조심스레 용기에 담았다.



4월 2일 비스바덴 연방경찰청


마르셀은 만하임 지방경찰청의 과학수사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피해자 마누엘 볼프람의 손톱 밑에서는 정원용 끈과 동일한 재질의 섬유가 발견되었고, 교살흔과 범행도구의 모양도 일치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운 수사였다. 그들은 강도살해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만하임 내에서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해 연방 경찰청 중앙 과학수사팀에게 이관된 것이다.


특이점: 피해자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는 점과 교흔의 깊이를 보아 범인을 남성이라고 추정했으나, 자택 내 서랍 손잡이에서 채취된 용의자의 DNA가 여성의 것으로 판명. 만하임 내의 DB상 일치하는 사람 없음.



마르셀은 무언가 자신의 머리를 관통하는 느낌에 멈칫했다.


“강도살해, 끈을 이용한 교살, 용의자 특정 불가...”


마르셀은 갑자기 흥분한 듯 자판을 두드려댔다. 초기부터 함께 일한 베트남계 조수 제니퍼가 놀라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마르셀은 차분한 성격이라 소음을 만드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공문을 쓰고 있었다.


수신: 라인란트팔츠 주 형사경찰청
발신: 연방경찰청 중앙과학수사팀 수석반장 마르셀 폴머
내용: DNA 프로파일링을 위한 STR분석[1]의 정확도 증가와 PCR[2]의 보급으로 미제사건의 DNA 시료들을 재검사할 계획이니, 1998년 이전의 미제사건의 자료와 DNA 시료들을 4월 12일까지 모두 연방 경찰청 중앙 과학수사팀으로 이관하기 바람.

[1]: 단연쇄 반복 분석 Short Tandem Repeat Analysis: DNA의 특정 염기서열이 짧게 반복되는 영역을 분석하는 기술. 개인 식별(유전적 지문)에 사용.

[2]: 중합효소 연쇄 반응 Polymerase Chain Reaction: 극소량의 DNA라도 수백만 배로 증폭시켜 검출율을 높이는 기술.


마르셀은 1993년 자신이 처음 맡았던 미제사건 노이슈타트 살인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마인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법의학과에서 DNA 프로파일링 관련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경찰청의 러브콜을 받아 라인란트팔츠 주 형사경찰청에 과학수사팀에 특별 채용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교회 관리인이자 연금 생활자였던 65세의 샤를로테 벨첼 씨가 살해당했다. 교살이었고, 강도살해였다. 현장은 엉망이었고 귀중품과 현금이 사라졌다. 벨첼 부인의 시신 옆에는 보란 듯이 꽃다발을 묶는 철사줄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르셀과 제니퍼는 첫 현장에서 범인을 잡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방호복을 입고 보이는 모든 손잡이에 생물학 시료 채집용 면봉을 문질러댔다.


실험실에서 그들은 환호했다가 이내 절망했다. 찻잔 손잡이를 문질렀던 면봉에서 낯선 DNA 정보를 발견했지만 정확히 분석할 만큼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그것 외에는 어떤 용의자를 특정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기에, 그들은 시료를 냉동봉인하고 사건은 미제로 남겨야 했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기술은 발전했고, 그들은 재수사에 필요한 역량과 지위를 갖췄다. 이관된 증거들을 확인해 범인을 찾아낼 준비가 된 것이다.


이관용 보냉상자를 열자 마술쇼처럼 드라이아이스가 녹아 하얀 연기가 퍼져나갔다. 우선 시료들을 연방청의 특수냉동실로 옮기고 사건 파일을 뒤졌다. 1993년 5월 25일 노이슈타트.


“제니퍼. 이 사건 기억해?”


“당연하죠. 그때 제가 얼마나 원통했는지.”


마르셀은 파일에 기재된 증거번호 목록과 시료들의 번호를 매치시키며 뭘 찾고 있었다.


“찾았다. 이거야. 그때 그 찻잔 손잡이에서 나왔던 시료. 다시 분석해 올래?”


“해볼게요. 그런데 왜 하필 이 사건을 다시 보려고 하세요?”


“흔히들 직감이라고 하지.”


“직감이요? 반장님답지 않네요?”


“직감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야.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뇌가 내리는 빠른 판단이지.”


그 판단은 맞아 들었다. 신원미상 여성의 DNA. 만하임 사건현장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했다. 그 좌절감, 8년의 시간, 30km의 간극을 과학기술의 발전이 메꾼 것이다.


“미제사건이란 건 이제 옛말이 될 거야. 해결은 시간문제야.”


결과는 상부에 보고됐고, 두 사건은 강한 연관성을 인정받아 연쇄살인사건으로 묶였다. 언론은 앞다투어 의문의 연쇄살인범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신기술의 발전과 마르셀의 열정이 미제사건 재조사에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