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매너리즘

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by 어쩌다보니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2005 오스트리아 린츠


율리나는 이제 공장에서 일한 지 13년이나 되었다. 품질관리 쪽이나 작업반장 업무를 맡아보겠냐는 제의도 있었지만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직책, 해봐야 골치만 아파진다며 거절했다. 린츠 촌구석에서 공장 작업반장 따위 해봤자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는 주의였다. 고작 쏟아져 나오는 작은 제품들을 집게와 엄지로 한 개씩 잡아 알맞은 홈에 올려두는 일. 물론 신입들보다야 빠르고 정확했지만, 애초에 손가락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율리나는 평소처럼 에어샤워를 하고, 위생복을 착용했다. 잦은 소독으로 여려진 피부는 종일 착용하는 장갑 속에서 습기에 절여졌다. 손등에 생긴 습진은 어느새 만성이 되어 핸드크림을 두껍게 바른 후에 손소독제를 뿌리지 않으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소독제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배웠지만, 소독을 안 하느니 이렇게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신입이 휴지곽 같은 종이상자에서 하늘색 장갑을 꺼내다 2쪽을 더 뽑아 율리나에게 건넸다. 율리나는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습진이 있어서. 어차피 손소독도 했고 마지막에 감마선 살균하잖아. 너 껴.”


율리나는 공장에 유입된 욕심도 야망도 없는 젊은 아이들을 보며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일하는 동안 그녀의 정신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 'A.B.C. 살인사건'에 빠져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새로 생긴 그녀의 취미 중 하나였다. 퇴근길에 도나우 강가에 내려 석양이 질 때까지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읽고 다음날 공장에서는 미스터리와 트릭을 곱씹었다. 그녀의 몸은 공장의 일부가 되어 일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잘 짜인 다른 세상을 누볐다. 지루함을 이겨보려는 하나의 노력이었고 자기 몸을 묶어둔 계약에 대한 반항이었다.


‘이전의 살인은 진짜 원하는 살인을 감추기 위한 거였다니!’


아가사의 천재적인 트릭에 감탄해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고, 손은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8시간 반복했다.


퇴근 길에는 여느 때와 같이 도나우 강가에서 추리소설을 읽고, 집에 돌아오면 자신을 반겨주던 알렉스 대신 늙은 아버지와 산책을 했다. 산책로는 알렉스와 다니던 길 그대로였지만 달라진 구석이 있다면 산책하다 항상 거쳐가는 풀 밭에 만들어 준 알렉스의 조그마한 무덤이었다. 방구석 낡은 칼가방 옆에는 이제 더 낡은 칼가방이 놓여있었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덮여있었다. 율리나는 때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 지겨웠다. 무료한 일상을 수십 년 살아낸 아버지가 조기연금수령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재미없게 사는 모습을 보며 율리나는 경각심을 느끼기도 했다.


율리나는 퇴근 전 공장장 사무실에서 챙겨 온 휴가신청서를 손가방에서 꺼내 다가오는 부활절 연휴에 맞춰 휴가희망 날짜를 적었다. 2주 정도의 휴가. 언제 갈지는 정했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낡은 컴퓨터를 켰다.


‘지겨운 린츠.’


율리나는 이곳저곳 근처 다닐만한 곳을 검색했다. 스위스를 가보고 싶었지만 경비 문제로 포기하고, 체코는 언어 문제로 포기했다.


‘독일로 가야겠다. 기차 편을 알아봐야지.’


레일젯을 타고 뮌헨까지 약 3시간. 갈만한 거리였다. 휴가신청서 사인을 받으면 바로 기차표를 구매할 작정으로 그나마 저렴한 아침시간 티켓 1매를 저장해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