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2009년 1월 13일 비스바덴
마르셀은 사무실에 앉아 키르쉬하임의 악마와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의 의자 뒤편에 걸린 독일 남부와 인접국가들의 지도는 빨간 핀이 수도 없이 꽂혀있고, 연결된 빨간 실은 거미줄 같았다. 어느새 불어난 사진과 메모는 지도를 거의 덮어버렸다.
2004년 6월 13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토비아스 오마르(53세, 터키계 M 은행장). 새벽 2시경 자택 침대 위에서 목이 졸려 사망. 어질러진 자택 내부, 다량의 현금과 귀중품 분실. 용의자가 침입 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쇠지렛대에서 문제의 DNA 검출. 오스트리아 연방경찰청과 공조 시작.
2006년 10월 1일 독일 자를루이
티에리 슐츠(22세, 대학생). 집 앞 주차장에서 하차 중 목이 졸려 사망. 시신은 새벽 5시 출근 중인 A에 의해 주차장에서 발견. 주차장 바닥에는 급출발한 도난차량의 바퀴자국. 시신 위의 냅킨에서 동일한 DNA 검출. 차량을 이용 인접국가인 프랑스 국경을 넘었을 가능성에 프랑스 연방경찰청과 공조 시작.
그 외에도 수영장, 초등학교, 안경원 등의 크고 작은 범죄현장에서부터 20여 건에 달하는 차량 탈취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범행증거가 발견됐다.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미스터리 한 여성에 대한 공포가 언론을 통해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동유럽계 여성, 남성보다 덩치가 큰 여성, 작고 매력적인 여성, 턱수염 난 여성, 뿔이난 여성 등 온갖 제보가 빗발쳤으나 참고할 가치가 없는 정보였다. 일관성 없는 정보는 증거 능력이 없다.
마르셀은 운명 따위의 관찰불가능한 개념은 믿지 않았지만, 첫 임무를 좌절시킨 그 범인이 경찰을 농락하듯 여전히 세상을 배회하고 데에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연관 짓지 못했을 뿐, 다른 수많은 미제사건들도 그녀의 범행이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자의 근력으로 성인 남자를 이렇게 손쉽게 교살한다는 점, 범행 횟수와 역대 어느 사건보다 많다는 점, 유로폴의 공조가 필요할 정도로 범행지 간 거리가 멀다는 점, 무엇보다 16년간의 추적에도 유의미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 도시전설을 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유럽을 뒤덮은 광기에 마르셀은 질려버렸다.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마다 기자들은 '키르쉬하임의 악마' 따위의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가며 범인을 초자연적 존재처럼 다뤘다. 그는 이런 맹신에 사로잡힌 대중의 수준이 중세시대의 인간들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녀사냥이나 했겠지.’
마르셀은 머리가 쭈뼛거리는 오싹함을 느꼈다. 마녀.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이 모든 사건을 관통할 하나의 고리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애써 증거수집의 열의를 다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사의 기본은 귀납적 사고라 말하는 게 그의 입버릇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직감이, 생존에 유리한 뇌의 빠른 판단이 자꾸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우-웅"
휴대폰 진동 소리에 확인해 보니 저장되지 않은 12자리 번호가 찍혀있다. 사실 아는 번호였지만 저장하지 않은 번호였다. 아니, 정확히는 저장했다가 지운 번호였다. 마르셀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도, 혹은 그의 기억력이 나쁜 편이었더라도 이 번호를 잊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 ‘잘못 걸었겠지, 급한 일이면 다시 전화하겠지.’ 되뇌면서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같은 번호로 두 번 온 전화를 거절할 만큼 강한 핑계는 없었다. 수신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조심스레 귀에 가져다댔지만 입은 열지 못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어, 무슨 일이야?”
“오랜만이지?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아무 말 없는 마르셀에게 목소리의 주인은 대뜸 만나자고 했다. 마르셀은 자신이 반가워하는지 두려워하는지 자기감정을 파악하지 못해 불안했다. 근처 아이리쉬 펍에서 만나자는 제안에 얼떨결에 알았다고 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제니퍼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며 외투를 두르고 황급히 경찰청을 빠져나와 펍으로 향했다. 밖은 흩날리는 진눈깨비에 유난히 춥고 축축했다. 그는 문을 열고 자신을 안내해 줄 종업원을 기다렸다.
“일행이 있는데요. 아마 베르거로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여기야.”
노라 베르거. 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반갑다는 듯 자연스레 포옹했다. 심각한 마르셀과 달리 그녀는 너스레를 떨었다. 21년 만의 재회였음에도 어쩐지 저번주에 본 친구보다 심심한 광경이었다. 마녀 같은 차림의 노라의 눈빛은 어쩐지 생기가 없었고 젖살이 빠져 얼굴은 야위어 보였다. 세월의 풍화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머리칼은 오히려 더 붉어진 것이 염색을 한 게 분명했다. 반면 마르셀에게서는 깔끔한 범생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잦은 야근으로 초췌했고, 못 깎은 수염이 너저분했고, 금발의 머리는 어느새 은회색이 되어있었다. 서로 잘 지냈냐는 형식적 물음에 건성으로 그렇다 답했다. 그들은 할 말이 지나치게 많아 내놓을 수 있는 말이 없어 대화가 뚝뚝 끊겼다.
“그래서 20년 만에 찾아온 이유가 뭐야?”
“21년이야, 마르셀.”
21년. 잊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닳아 없어지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뉴스에서 네 활약 지켜보고 있었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침 삼키는 일이, 집중해서 해내야 할 만큼 성가신 일이 됐다.
“그 여자 DNA.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지?”
그의 예상과 달리 갑작스레 사건 이야기로 넘어갔다. 정죄와 회개의 끝없는 랠리가 이어질 줄 알았던 그는 약간 안도했다.
"몽마야. 마르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르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한풀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은 그에게 정죄보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듣다가 괴로워 그는 딴생각을 했다. 젊을 때 어디선가 읽어본 러시아 작가의 블랙코미디를. 어느 연출가에게 한 여자가 찾아와 자기가 생각한 시나리오에 대해 5시간을 떠들어대고, 연출가는 고통을 못 견뎌 결국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는 이야기.
노라가 해준 말은 요약하면 이랬다.
1. 몽마는 실재한다.
2. DNA가 일치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범인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여성임에도 남성을 손쉽게 살해하고, 범행시간, 범위가 방대한 이유는 범인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황당한 설명은 아무런 증거도, 합리성을 획득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모든 사건을 관통했다. 바로 그 점이 마르셀의 목을 졸랐다. 모든 것을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마르셀은 현기증을 느꼈다.
“... 노라, 이제 그만해.”
“몽마야, 마르셀. 틀림없어. 너도, 그들도 몽마에 홀린 거야.”
노라의 눈이 번뜩였다. 마르셀은 조금 있으면 무슨 사달을 낼 것만 같았다.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삼켰다.
“먼저 갈게. 이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봐야 해. 조심히 들어가.”
무거운 문을 젖히자 울리는 딸랑 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