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진실

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by 어쩌다보니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2009년 3월 3일 비스바덴


2월 27일에 일어난 한 사건이 견실한 댐에 구멍을 냈다. 프랑스 낭시에서 발견된 남성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DNA가 검출된 것이다. 사체는 2002년 실종 신고된 남성 이민자의 것으로 밝혀졌지만, 처음 검출된 DNA 정보는 여성의 것이었다. 그것도 연쇄살인범의 DNA. 남성의 몸에서 여성의 DNA 정보가 검출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공조에서 손을 떼고 다른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겠다 통보했다. 독일 연방경찰청도 수사과정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제니퍼를 비롯한 팀원들은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르셀의 자리는 정리할 게 없었다. 게시판은 깨끗했다. 아니 비어있었다. 지저분하게 붙어있던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지, 빨간 핀과 실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접힌 노트북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마르셀은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버리고 근처 아이리쉬 펍에 앉아있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경위서를 제출한 뒤였다. 그는 펍 구석에 앉아 여느 실연당한 남자처럼 퀭한 얼굴로 부쉬밀 16년 한 병을 사서 이미 절반 가량 비우고 있었다. 비어있는 기네스 500ml 잔을 이미 종업원이 두 차례나 치워갔다. 맞은편에 위치한 바에서 바텐더가 칵테일을 바쁘게 섞고 있었고, 바 위의 천장에 매달린 TV에서는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보도되고 있었다.


기자: 지난 월요일 오스트리아 연방경찰은 키르쉬하임의 악마라 불리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았다고 발표했습니다. DNA의 주인은 오스트리아 린츠 소재 아마이젠 바이오테크의 공장직원인 41세 여성 율리나 후버. 유로폴이 쫓던 범인 아닌 범인의 정체가 평범한 공장 직원인 후버 씨였던 것입니다. 경찰이 증거를 채집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아마이젠 바이오테크의 멸균면봉에는 이미 율리나 후버의 DNA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40여 건의 사건에서 검출된 DNA는 이미 조사 전부터 면봉에 묻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수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제조사 측에 피해보상을 청구하겠다는 연방경찰청에 아마이젠 바이오테크 측은 자사는 명시된 멸균기준을 엄격히 지켰으며, DNA 오염은 법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보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리나 후버(41세): 습진이 있어서 장갑을 끼지 않았어요. 땀이 차면 습진이 심해졌거든요. 대신 손소독이랑 위생복 착용 같은 규정은 잘 지켰어요. 그리고 또 어차피 마지막에 멸균과정이 있거든요?

마르셀 폴머(45세, 중앙과학수사팀 선임반장): 시료 채취용 면봉의 DNA 오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수사 혼선으로 각 사건의 실제 범인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전부 원점부터 재조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기자: 키르쉬하임의 악마는 없었습니다. 대신 한 노동자의 일탈과 DNA 오염에 대한 법적 기준 누락, 과학적 증거에 대한 맹신이 있었을 뿐입니다.


쾅-!


식탁 위의 식기들이 흔들려 달그락거렸다. 펍의 이목을 끌며 생겨난 짧은 침묵은, 일전의 소음이 중년 남성의 술주정으로 판명됨으로써 무심히도 본래의 소란으로 돌아갔다. 웃음소리, 건배소리, 윽박지르는 소리에 키르쉬하임의 악마도, 마르셀의 사명감도 사그라들어갔다. 그는 흐릿해진 시야로 식탁 위의 촛불을 응시했다. 몸을 가누지 못해 식탁에 기댄 채,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반쯤 감긴 눈으로.


‘몽마야, 마르셀. 틀림없어. 너도, 그들도 몽마에 홀린 거야.’


마르셀은 울음 섞인 괴성을 지르며 잔을 던져 깨뜨렸다. 그리고 카멜색 낡은 가죽지갑에 들어있던 50유로 지폐 세 장을 식탁 위에 꺼내놓고는 한 손에 위스키 병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밟아 댄 유리조각이 바스락거렸다. 왼쪽. 오른쪽. 벽과 식탁들을 짚어가며 그가 만든 적막을 밀어젖히고 그는 펍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