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하는 몽마의 그림자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재창조된 픽션입니다.
1988년 독일 마인츠
노라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때였다. 생화학과 범생이들 사이에서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독보적인 고스족 여학생. 그녀는 레이스와 자수가 많은 검정 옷만을 입었다. 하지만 그녀가 눈에 띈 것은 단순히 그녀의 검고 과감한 옷차림이나 진한 아이 섀도, 길게 늘어진 붉은 머리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퇴폐적인 분위기에 레이첼 맥아담스를 닮은 사랑스러운 얼굴이 상반되는 매력을 더했다.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자주 머물렀고 그녀도 그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관계는 깊어져 디플롬[1]을 마쳐갈 즈음에는 함께 살게 됐다. 그녀는 학업을 관두고 작가가 됐다. 평소에도 다양한 신화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고스족 커뮤니티에서 꽤 알아주는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주로 악마사전이나 마녀사냥을 배경으로 한 페미니즘적 소설을 썼다. 그녀는 딱히 반기독교적이진 않았다. 다만 기득권에 자주 반감을 표했던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대의 약자인 여성이 초자연적이고 특출 난 능력으로 중세의 기독교라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녀의 과감한 스타일도 여자에게 기대되는 조신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엘리트적으로 자라온 나에게 그녀는 신비로운 존재였고 아주 깊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성관계에도 적극적이어서 고등교육과정에 있던 나에게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마르셀, 보여줄 게 있어.”
그녀는 두줄 표시가 된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줬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뻐하기로 했다. 그녀가 기뻐했기에. 임신은 단순히 가족의 일원이 늘어나는 게 아니다. 미래의 무작위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부터 성별, 장애여부, 성향, 부모의 성향, 육아와 생계, 집의 크기 재고려, 가구의 배치, 주변 환경 등 삶의 모든 것들을 재조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벅찬 감정과 자잘한 염려들이 사그라들었다. 노라는 평소처럼 정기 진단을 받는데 의사의 표정이 심각했다고 했다. 의사는 당황한 얼굴로 초음파를 여기저기 비춰보고는 아이의 심장이 멈췄다고 했다. 그녀는 울며 나에게 전화를 했고,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던 나는 즉각 병원으로 달렸다. 의사는 자연배출과 약물치료, 수술적 제거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너무나 낯선 고민이었다. 과다 출혈 등의 위험에 따라 의사의 권유로 수술적 제거를 택했다. 게다가 죽은 아이가 생리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상상을 하니 다른 선택은 엄두가 안 났다. 자궁경부 이완제를 맞고 2시간 뒤 양수가 쏟아졌고, 그녀는 또 울었다. 그리고 수술대에서 잠들었다 깬 후에도 울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가 죽었다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됐나. 임신 초기가 지났다고 관계한 것이 문제였을까. 얼마 전 유산에 대해 소설을 썼던 것이 영향을 끼친 걸까. 아이를 위해 잠시 쉬어야 했나. 좋은 것만 보고 생각했어야 했다면서 자책했다. 나는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불행은 그저 무작위로 찾아오는 거라고 그녀를 달랬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후로 그녀는 자주 잤다. 밤에도 낮에도 잤다. 그녀가 깨어있는 길지 않은 시간에 나는 그녀와 산책을 하거나 밥을 먹었고, 그녀가 잘 때는 논문을 읽고 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당연히 육체적 관계도 없었다. 그녀의 상실감을 고려하면 당연한 처사였다. 나는 완전히 이해했고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는 어차피 졸업 시험을 앞두고 여유가 없었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감정적으로도 지쳤다. 하지만 몸의 생리는 다르다. 인간의 육체는 언제든 번식을 위한 최선을 다 한다. 잦은 성관계를 멈추자 생성된 정자를 배출해야 했던 내 육체는, 청소년기에나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해결책을 택했다.
그날 꿈에서 깼을 때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속옷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가 세면대에서 속옷을 문질러 빨았다.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었지만 낡은 문에서는 관절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긴장하며 침대 쪽을 살폈지만 다행히 그녀는 자는 모양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차림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갈색 나무로 된 수납장을 열어 새 속옷을 꺼내 입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옆에 누워 다시 잠에 들려던 차에 내 눈은 어둠에 적응했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의 눈이었다. 언제부터 깨있던 걸까. 다 지켜본 걸까. 눈빛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뚫고 뇌 속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깼어? 시끄러웠지. 미안해.”
“괜찮아. 그전부터 깨있었어.”
다 봤구나. 숨고 싶었다. 옥탑방 작은 창문으로는 달빛이 은은히 비췄고, 그녀의 볼을 따라 흐르는 작은 물방울이 반짝였다.
“... 울어?”
“누구야?”
“누구, 냐니?”
“상대가 누구냐고.”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침묵했다.
“너는 이런 상황에….”
이런 상황. 생리적 활동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티베트의 고승들은 체온까지도 조절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도 있지만, 나는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수행이 있다고 한들 그들도 몽정을 할 것이다. 몽정은 그냥 하는 것이다. 정낭이 차고,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 뇌는 렘수면 상태에서 야한 환상을 만들어내 낡은 정액을 배출하는, 건강한 정자를 유지해 번식확률을 높이기 위한 신체활동일 뿐이다. 그녀는 내 설명, 혹은 변명을 듣지 않았다. 그리곤 뒤돌아 누웠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결국 잠에 들었다.
“이것 봐.”
이른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난 그녀는 내가 깨자마자 그녀가 애정하는 악마 대백과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나는 눈을 비비며 안경을 찾아 썼다. 서큐버스였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진지했다. 내가 만약 성욕을 주체 못 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외부적 요인이 있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논리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뭐,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앞두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뭐든 빌려오기도 하니까. 신도 악마도 그런 것이고.
“노라, 그런 게 아니라 이건 그냥 생리현...”
그녀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아니야. 확실해. 네가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그런 사람이란 말에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여자친구가 품었던 아이가 죽어 슬퍼하는데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꿈속에서라도 욕정을 푸는 추잡한 인간.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해. 노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뭐냐고!”
그녀는 못 참고 언성을 높였지만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한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었다. 어쩌면 그런 자연에 전-과학적 설명을 붙이려다 보니 서큐버스니 뭐니 하는 신비스러운 존재를 만들어냈겠지. 그녀도 모를 리가 없었다. 서큐버스가 내 정액을 훔치려 했다니. 스트레스로 이성이 마비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때 스트레스로 이성이 마비됐던 건 나였을지 모른다.
“니콜이었어.”
때로는 불필요한 진실도 있다. 세상에 드러날 필요가 없는, 아무에게도 유익이 없는 진실. 니콜은 노라도 아는 학교 후배이고, 노라와 진지하게 만나기 전 잠자리 상대였다. 나는 당장의 괴로움을 못 견디고 진실을 뱉어버렸다. 아무리 꿈 속이라도 니콜과 정사를 즐겼단 게 들통나면 그녀와는 끝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헛소리에 시달리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 숨을 들이마시다 멈추고는 빈 숨을 뱉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말, 혹은 들어선 안될 말을 들어서 단지 할 말을 잃었던 걸까. 아니면 나를 한심하게 여겨 말도 하기 싫었던 걸까. 경멸했나. 어쩌면 그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잠시 나를 멍한 눈으로 보고는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노라, 그냥 꿈이야. 이제 걔한테 아무 마음도 없는 거 알잖아.”
노라는 대답 없이 짐을 쌌다. 짐을 싸는 모습이 대답이었을지 모른다. 짐을 다 챙기고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 뒤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1]: 독일 전통적 학위 제도에서의 학석사 통합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