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하노이
어딘가에 짐을 둔 건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그리 길지 않은 비행시간을 지나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마치 새로운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나는 이번 여행이라는 무대의 막을 올렸다.
숙소는 예전 혼자 여행하며 만난 베트남 친구, 린이 내 방 한 켠을 내어주기로 해서 일주일간 머물기로 했다.
몇 년 전, 하노이에서 길을 잃고 있던 내가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길을 물었을 뿐인데,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 현지 맛집으로 데려갔다. 본래 약속이 있었지만 취소되어 함께 식사할 사람이 필요했다는 그녀의 이유. 그 즉흥적인 선택이 우리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 후 남은 여행을 그녀의 안내로 즐겁게 보냈고, 그녀는 한국에 가족과 함께 여행 오면서 친분을 쌓았다. 이번 여행에서 덕분에 숙소는 무료로 마련되었다. 린은 이혼한 미혼모였고, 아이들은 내게 뛰어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하얀 고양이도 있었는데, 집에서 키우는 검은 고양이가 떠올라 더욱 반가웠다.
짐을 풀고 나니, 린은 저녁을 준비하며 내일은 친한 동생을 만날 거라고 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일찍 자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나는 그때 몰랐다. 그 친한 동생과의 만남이, 여행 시작부터 설레이는 인연이 될 줄은
다음 날, 린은 나를 하노이시내에 데려다주고 일정이 있다며 돌아갔다.
“오늘은 여기저기 구경잘하고, 저녁에 친구랑 만나자.”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하루가 어느새 저물었다.
저녁, 숙소 앞. 린과 함께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린보다 키가 크고 눈이 크며, 피부는 하얗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그녀. 운동복 차림이었고, 팔에는 작은 문신 몇 개가 있었다. 커트 머리로 단정하게 정리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의 이름은 비였다.
셋이 식탁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는 틱톡 인플루언서였고, 베트남에서도 활동이 활발했다. 린에 따르면, 비는 인스타그램으로 내 여행 소식을 알고 있었고, 꼭 소개받고 싶다고 했다.
식사 후, 린이 먼저 숙소로 돌아가고 비와 나는 큰 헬스장으로 향했다.
7일밖에 머무르지 못하는 내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비는 한 달짜리 헬스권을 망설임 없이 끊어주었다.
운동을 시작하자 서로가 보조를 맡으며 자세를 잡아주고, 가벼운 도움 손길이 이어졌다. 팔을 맞대고 무게를 조절해주거나, 스트레칭을 도와주며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생겼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런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친밀감은 천천히 쌓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또 보자.”
작별 인사 후, 나는 다음 만남을 기대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200일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러닝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번 세계여행에서 세운 목표는 단 하나였다. “끝날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자.”
나라가 바뀌어도, 도시가 달라도, 내가 서 있는 그 길 위에서 반드시 뛰어보는 것.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릴 때 마주하는 풍경은 늘 특별하다. 특히 시장으로 향할 때가 많았는데, 하루를 시작하는 상인들의 활기와 웃음,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덕분에 나도 다시 힘을 얻곤 했다. 오늘도 그 활기로 가득한 풍경을 달리고 돌아와 샤워 후 소파에 앉았는데, 그만 잠이 쏟아져 졸고 말았다.
낯선 알람음에 눈을 떴다. Zalo(베트남 카톡) 알림이었다. 비였다.
어젯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정한 약속이 떠올랐다. 정오에 만나 다시 운동하기.
허둥지둥 간단히 패스트푸드를 먹고 준비를 마치려던 순간,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 안 와?”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헬스장에서 다시 만난 비는 회사 점심시간을 쪼개 나와 있었다. “점심인데 어떻게 나왔어?” 묻자, 그녀는 그냥 웃었다. 적극적으로 시간을 내주는 모습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외국인이라서 그런 건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비는 “저녁에 밀크티 한잔 할래?” 하고 가볍게 말을 건넸다. 회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 새벽에 나는 닌빈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기차표를 미리 예매한 뒤, 약속한 대로 대형 쇼핑몰에서 비를 다시 만났다.
비는 반갑게 인사하며 내게 다음 여행지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나는 정해진 계획은 크게 없고, 약 2년 정도 여행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다음 나라는 늘 그 전 나라에서 정해 이동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비는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며 웃어주었다.
이어 베트남에는 언제까지 머무르냐고 묻길래, 비자 기간인 14일을 꽉 채울 생각이지만 하노이에는 일주일 정도만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그녀의 얼굴에 잠시 아쉬움이 스쳤다.
내일 닌빈으로 떠난다고 하니, 왜 혼자 가냐며 비싼 기차표는 왜 끊었냐고 물었다. 리무진을 예약했으면 더 싸고 편했을 거라며 살짝 타박하듯 말했는데, 듣고 보니 현지인에게 물어봤으면 확실히 더 쉬웠을 것 같아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모험을 즐기는 나로선 기차여행도 나름 낭만이 있다고 웃으며 넘겼다.
비는 일을 뺄수있다면 같이 가고 싶다고 했지만, 갑작스레 시간을 낼 수는 없어 아쉽게도 내일은 혼자 가기로 했다. 그러다 비는 내가 매일 러닝을 한다는 걸 떠올리며, 곧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데 그 코스로 함께 달려보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타지에서 열리는 대회, 낯선 사람들과의 러닝,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와 같은 호흡으로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설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 새벽 닌빈으로 떠나야 하기에 숙소로 돌아와 일찍 눈을 붙였다.
새벽 6시 하노이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기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아직 캄캄한 새벽, 그랩바이크를 타고 역 앞에 도착했는데, 어느 나라든 역 앞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오래된 간판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모습.
하노이역 간판을 지나 오래된 객차에 오르니, 무궁화호와 새마을호 사이쯤의 분위기였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낡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낡음 덕분에 한결 여행자 기분이 났다.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하다보니 기차 판매원이 지나가고, 호기심에 하나 집어 든 간식은 의외로 바삭하고 괜찮았다.
닌빈역에 도착하자마자 오토바이 삐끼가 달려왔다. 어차피 빌릴 생각이었기에 흥정을 시도했는데, 만땅으로 기름을 채워주고 15만 동이라 했다. 원래는 조금만 넣고 타려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싶어 빌리고는 짱안 생태공원으로 달렸다. 빗방울이 부슬부슬 흩날렸지만, 그 또한 낭만이라 여겼다.
공원에 도착하니 아침 9시. 표를 끊으려니 혼자서는 안 되고 몇 명 더 모여야 한단다. 잠시 기다리자 프랑스인 커플이 합류했고,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배에 올랐다. 노를 저어 나가자 풍경은 순식간에 영화 속으로 변했다. <콩: 스컬 아일랜드> 촬영지라던데, 밀림 같은 강변과 고요한 산세가 진짜 킹콩이라도 나타날 듯했다.
동굴 입구로 배가 들어서자 천장은 아찔하게 낮았다. 방심하다간 머리를 부딪칠 정도였다. 서너 개의 동굴을 지나 큰 사원에 닿았고, 잠시 둘러본 뒤 다시 돌아가는 길. 같은 풍경이 반복되자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졌지만, 노를 젓던 아주머니가 힘들어 보여 나도 함께 노를 저어주었다. 그렇게 3시간 반의 긴 보트 여행이 끝났을 때, 땀과 비에 젖은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점심으로 닌빈 명물인 염소 고기를 맛봤다. 양고기와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향이 있었다.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맛있지도 않은 ‘쏘쏘’한 맛. 밥은 유난히 푸짐하게 나왔고, 함께 나온 두부 요리와 곁들여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어 항무아 전망대에 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 성산일출봉을 연상케 했지만, 더 가파르고 더 숨이 찼다. 헉헉대며 올라 도착한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사진으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 거대한 초록의 파노라마. 그 순간만큼은 힘들었던 발걸음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산하니 이미 오후 3시. 4시 반 기차를 타야 했기에 서둘러 러닝을 했지만, 하필 고프로 버튼을 잘못 눌러 기록이 다 날아갔다. 그나마 가민 시계에 일부가 남아 다행이었다. 닌빈역에 돌아오니 4시 10분. 간신히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블랙커피 한 잔을 들이켠 뒤 기차에 올랐다.
아름다운 창밖 풍경이 스쳐 지나갔지만,피곤이 몰려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닌빈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짧고도 진하게 스쳐갔다.
꿈을꾸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서로 젖어가면서도 가볍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순간이 너무 생생해서, 깨어나자마자 아직도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눈을 뜨니 기차는 이미 하노이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안내 방송이 뒤섞이고, 묘하게 습한 공기가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꿈과 현실이 겹쳐진 채, 나는 천천히 가방을 챙겨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에 문을 나서자 비가 오토바이를 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러닝하러 가자”는 손짓에 자연스레 뒷자리에 올랐다. 대회 준비로 차량이 통제된 거리를 피해서 달려 외곽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호안끼엠 호수를 안쪽에 두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면서도 스몰토크를 멈추지 않았다. 가벼운 운동 이야기로 시작해, 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틱톡은 단순한 취미인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운 사람이었지만, 베트남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나는 여자를 만나러 세계여행을 떠난 게 아니었기에, 그저 남은 시간을 소중히 함께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페이스를 올렸는지, 3km 즈음에서 비는 여기까지만 뛰겠다며 멈춰섰고, 나는 두 바퀴를 더 돌았다. 걷고 있는 비에게 인사를 건네자 비는 내 달리는 모습을 휴대폰에 담아주었다. 5km를 채운 뒤, 근처 대회장 부스에서 처음 본 ‘커피맛 레드불’을 받아 함께 짠을 하고 마셨다. 그런데 그 맛은 커피도, 레드불도 아닌 어중간한 무언가였다. 동시에 얼굴이 굳어 서로를 쳐다보는 순간, 폭소가 터졌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이었다.
땀이 식고 배가 고파져 근처 쌀국수집을 검색하려 하자, 비는 내 휴대폰을 덮으며 “그냥 따라와”라는 손짓을 했다. 안내받아 간 곳은 특이하게 손바닥만 한 고기 두 덩이에 쪽파를 올려주는 쌀국수집이었다. 고수 향이 강해 살짝 걱정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향이 잘 어우러져 오히려 더 맛있었다. 현지인 픽은 역시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이어 디저트로는 에그커피를 생각했는데, 비가 갑자기 “타오포라는 연두부에 젤리빈을 넣은 디저트가 있다”며 먼저 그곳으로 안내했다. 두부를 좋아하는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맛이었지만, 달달한 젤리와 함께 먹는 연두부의 부드러움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에그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블랙버드라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다시금 대화를 이어갔다.
그때 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엄마한테 네 이야기를 했는데, 꼭 한번 식사를 해보고 싶어 하셔.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 머무는 숙소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부담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결국 알겠다고 답했고, 저녁 약속이 정해졌다. 비는 출근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고, 나는 혼자 하노이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현지 분위기를 만끽했다. 하지만 조금씩 피곤이 밀려와 숙소로 돌아가 한 시간 남짓 낮잠을 청했다. 저녁, 비의 엄마와의 식사에 정신도 몸도 맑게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 식사 초대를 응하기 위해 비의 집으로 걸어갔다. 린의 집에서 비의 집까지는 고작 10분 남짓. 하지만 짧은 길 위에서 내 마음은 괜히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색하지 않을까—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문 앞에서 조심스레 Zalo(베트남 카톡) 메시지를 보내자, 비가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왠지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비의 어머니가 환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부엌에선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집은 아파트라 해도 규모가 남달랐고, 대리석으로 꾸며진 주방은 마치 스튜디오처럼 거실에서 조리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비의 어머니는 내 긴장을 단번에 풀어내는 듯한 밝고 인자한 미소로 “정말 환영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미소에 내 마음은 무장 해제되었고, 동시에 내 편안한 인상이 어머니께도 좋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비는 나더러 잠시 소파에 앉아 있으라 했고, 나는 집에 있던 고양이 두 마리(원래는 세 마리지만, 한 마리는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와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요리가 완성되었다. 세 가지 메뉴였지만 정성이 가득 담겨 있어 식탁은 한껏 풍성해 보였다. 장조림처럼 생긴 요리 하나, 오징어와 부추를 볶은 요리 하나, 그리고 돼지고기와 감자, 고수가 들어간 국 한 그릇. 오랜만에 제대로 된 가정식을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국은 고수가 들어 있어 걱정했지만, 의외로 점점 입맛에 맞아갔고 결국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워 버렸다.
식사가 무르익을 즈음, 어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셨다.
“우리 딸, 어떠니?”
한국을 좋아해 한국 사람을 꼭 만나고 싶었다며, 비가 내 이야기를 좋게 전해 주어 오늘을 고대했다고 하셨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며 나 또한 소중한 친구라 대답했다. 하지만 동시에 솔직하게 말했다. 이제 막 세계여행을 시작했을 뿐이라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내일모레면 다음 도시로, 또 다음 나라로 떠나야 한다고.
그 말에 비와 어머니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언제든 베트남에 다시 오면 머물 수 있게 해주겠노라, 집도 여러 채 있으니 편히 지내라며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순간, ‘비의 집안은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 정신을 다잡았다. 감사한 마음만 전하며 “비와는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고, 앞으로 여행 중에도 종종 들르겠다”고 말했다.
식사가 끝난 뒤,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는 넷플릭스를 켰다. 나란히 앉은 자리, 손끝이 살짝 스치며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맞닿았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하노이에서의 일정은 이제 하루 남짓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비와 함께 마지막 운동을 했다. 늘 성실히 임하던 비였지만 그날만큼은 집중이 덜한 듯 보였다. 운동을 마치고 마신 커피 자리에서, 비가 선물을 내밀었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튼튼한 사이드백 하나, 그리고 ‘Hanoi’가 적힌 티셔츠 하나였다. “여행 잘 다녀오고, 꼭 다시 돌아와 줘”라는 말이 덧붙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린과의 마지막 저녁식사 전에 따로 인사할 시간이 없으니, 일부러 지금 선물을 전한 것이란 걸. 순간 안아주고 싶었지만, 떠날 사람의 마음에 괜한 여운을 남기고 싶지 않아 망설였다. 그러나 비가 두 팔을 벌리자 그제야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바보야. 이럴 땐 그냥 안아주면 되지. 왜 이렇게 소심해?”
그 구박조차 싫지 않았다.
그 순간, 이게 마지막일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한 장의 이야기가 조용히 덮였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 멈췄다.
하지만 현실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린이 추천한 하노이의 야장 식당에서 우리는 셋이 마지막 만찬을 함께했다. 시원한 맥주잔이 부딪히며 거품이 흩날렸고, 바비큐 냄새가 골목을 타고 퍼졌다. 린과 비는 여전히 장난을 걸어왔고, 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 귀에 확 꽂히는 한국어였다.
“형?”
순간, 숟가락을 들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영도가 서 있었다.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얼굴. 하노이 한복판에서 마주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 영도? 너 여기서 뭐하냐?”
“출장 왔다가… 설마 형일 줄은 몰랐죠.”
린과 비는 갑작스러운 재회에 놀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테이블은 하나로 합쳐졌고,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낯선 도시의 밤, 예상치 못한 만남.
비와의 이별의 여운이 가슴에 남아 있던 순간, 영도라는 또 다른 인연이 내 여행길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베트남-사파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