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고산병, 웃음, 그리고 UFC

베트남-사파

by 예한

사실, 영도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며칠 전, 한국 라면이 먹고 싶어 들른 하노이의 한 한인 편의점에서였다.

라면 진열대 앞에서 동시에 같은 라면을 집어 올리려다 손이 부딪혔다.

“어… 한국인이에요?”

낯선 도시에서, 낯익은 언어가 튀어나왔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손에 든 봉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이건 제가 먹게 해주셔야 합니다. 전 진라면 아니면 글이 안 써져요. 진짜예요.”

황당해서 웃음이 터졌지만, 그는 전혀 농담 아닌 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매운맛 없으면 제 원고도 싱겁거든요. 제 인생의 조미료 같은 거라니까요.”

결국 우리는 라면을 반씩 나누고, 맥주 몇 캔을 더 집어 들었다.


계산대 앞에서도 그는 또 한 마디를 던졌다.

“아, 이건 제가 낼게요. 제 인생은 이미 마이너스라, 더 마이너스 돼도 티가 안 나거든요.”

그 순간,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 한국 체대 나왔거든요. 근데 지금은 글 쓰는 사람이에요. 몸은 근육인데, 통장은 깡마른 타입이죠. 남들은 문학 한다고 멋있다는데, 저는 월세 걱정 때문에 문 닫을 판입니다.”

허세 같으면서도 묘하게 웃음을 주는 말투.

대책 없어 보이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에너지.

그때부터 직감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여행길의 스침이 아니라, 언젠가 또 얽히게 될 인연일 거라고.


직감은 결국 이렇게 현실이 되었고, 린과 비, 그리고 영도와 즐거운 저녁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일정을 이야기하던 중, 출장으로 왔다던 영도가 이렇게 말했다.

“형, 근데 저도 지금 출장으로 오긴 했는데… 지원금 받을 게 입금이 안 돼서 마냥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고, 만나기로 한 대표님도 일정이 밀려서 며칠 뒤에나 올 것 같아요. 형 여행지에 한번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혼자 여행으로 시작했는데 단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을 것 같은 약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여행 초반, 동행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더 힘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도는 내 파티에 합류했다.


린과 비와는 ‘다음에 또 보자’며 작별을 하고, 우리는 하노이 시내로 내려왔다.

다음 행선지는 사파였다.

사파는 고지대 도시로, 네온사인이 화려하고 비가 자주 내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고, 거기엔 판시판이라는 산도 있어 한 번쯤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야간 버스를 예매하고, 낮에는 하노이 먹방 투어를 하며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마침내 버스에 올라 사파로 향했다.


낯선 도시에서, 더 낯선 인연이 동행이 되었다.

낯선 음악이 흘러나오는 버스 안, 영도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또 한 마디를 던졌다.

“형, 근데 제가 원래 기승전결 드립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거든요. 뭐든 결국 결론은 웃겨야 돼요. 그래야 먹고살 수 있다니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진지한 얼굴로 별말 아닌 농담을 툭 던지는 사람.

어쩌면 여행은 그런 사람과 함께해야 더 오래 기억되는 게 아닐까.

우리가 향하는 곳은 사파였다.


고지대의 도시, 낮게 깔린 구름과 자주 내리는 비, 그리고 언젠가 올라가야 할 산, 판시판.

그곳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번 여정도 더 이상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버스는 밤새 달려 새벽녘에야 사파에 도착했다.


판시판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올라가거나, 가이드와 함께 걸어 올라가는 것.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전날 밤 예약이 필수였고, 출발 시각도 새벽 6시였다. 우리 버스가 도착했을 땐 이미 6시를 넘긴 상황이었다.

숙소 주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오늘은 어려울 것 같다”라 했지만, 영도는 특유의 입담을 터뜨렸다.

“우린 슈퍼 코리안입니다. 슈퍼 코리안은 못 하는 게 없어요!”

나도 거들었다.

“이 친구는 체대 출신이고, 나는 매일 러닝으로 체력을 길렀으니 충분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도가 판시판이 인도차이나의 지붕, 해발 3,140미터의 거대한 산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


그는 그냥 동네 적당한산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결국 원래라면 산장에 묵으며 1박 2일로 올라야 할 코스를, 우리는 가이드와 함께 당일치기로 도전하게 되었다.

가이드는 근처 슈퍼에서 우의를 사야 한다며 우리를 데려갔다.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웬 비닐우의인가 의아했지만, 묻지 않고 따랐다.


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8시. 보통 사람들의 출발 시각보다 두 시간은 늦은 셈이었다.

가이드는 간단히 몸을 풀게 한 뒤 말했다.

“이 산은 쉽지 않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영도의 웃음 섞인 드립 뒤에, 곧 분노의 화살이 나를 향할 줄은.

그리고 우리 앞에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산속으로 돌입했다.

날씨는 맑고 초반부 산행은 아름답고 쉬운길이라 휘바람을 불면서 즐기면서 천천히 가고있는데 가이드가 한마디를 덧붙혔다.

“오늘은 당일치기라 속도를 늦추면 안 됩니다.”

담백하게 던져진 경고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옆에서 영도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했다. 특유의 장난기 섞인 얼굴로 나를 흘끗 보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아니, 형. 이 정도면 그냥 북한산이잖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한 마디는 더했다.

“제가 체대 나왔는데, 이 정도 산은 체대 입구 시험 수준입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얘, 진짜 큰일 나겠는데….’ 아직 판시판의 위력을 모르는 자만의 미소였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산이 대신 가르쳐줄 테니까.

해발 1,500미터를 넘어서자 숲이 우거지고 길은 비교적 완만해졌다. 체력이 덜 빠지니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영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특유의 언어유희를 풀어냈다.

“형, 산에도 기승전결 있잖아요. 지금은 기(起), 조금 있으면 승(承)… 근데 저는 아마 곧 결(結) 날 것 같네요.”


나는 빵 터질 뻔했지만, 일부러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영도의 입에서 또 다른 드립이 터졌다.

“저희가 슈퍼 코리안이잖아요. 슈퍼 마리오처럼 금방 올라갈 겁니다.그리고 형 스파르탄 기합소리가 어떤지 아시죠? 이따 힘들어지면 그 기합소리를 내면 될겁니다. 미리 알려드릴게요 따라해보세요 아루!!!!!!!!”

그의 농담은 뻔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을 풀어줬다. 힘든 산길이 잠시만큼은 놀이 같아졌다. 나도 모르게 농담에 맞장구를 치고, 걸음걸이가 가벼워졌다.

앞서 걷던 가이드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길을 열어주고 있었지만, 뒷모습에 깃든 표정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괜찮은 걸까?’


해발 2,200미터 즈음이었을까. 갑자기 하늘이 뒤집히듯 비가 쏟아졌다.

산 입구에서 괜히 산행 전 사장님이 우의를 사라고 했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비를 막으라고 입은 게 아니었다. 진짜 용도는 따로 있었다.

길이 곧장 흙탕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신발이 쭉쭉 빠지고, 흙이 미끄럼틀처럼 발목을 잡아챘다.

마치 산 전체가 우리를 시험하듯, 진흙으로 공격을 퍼붓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여유롭던 영도가 드디어 폭발했다.

“아니 형!! 이게 왜 산입니까? 그냥 흙탕물이잖아요!!”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영도의 얼굴은 한 치의 농담도 없이 진지했다.

“저는 그냥 출장와서 가볍게 여행하려고 했는데,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비에 젖은 얼굴, 진흙에 반쯤 잠긴 신발, 그리고 툭툭 튀는 드립.

이 모든 게 기괴하게 어울리며, 그 순간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야, 체대 나온 슈퍼코리안이잖아. 이 정도쯤이야!”

하지만 영도의 표정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웃어넘기기엔, 그의 분노가 꽤 진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이 판시판 등반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 둘 사이에 한 번은 터질 갈등의 무대가 되고 있구나.


고도가 2,500미터를 넘어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숨이 턱턱 막혔고,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처음엔 농담을 퍼붓던 영도의 입도 서서히 닫혀 갔다.

그는 헐떡이며 내 쪽을 흘겨봤다.

“형… 내가 체대를 나왔는데… 졸업 후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에요.”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은 웃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잠시 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내게 향했다.

“형이 하자고 했잖아요… 형 때문에 내가 여기 있어요…”

그 목소리에는 피곤함을 넘어선 원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발걸음만 옮겼다.

내가 먼저 판시판을 가자고 제안했으니까. 책임이 내 쪽에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거친 호흡과 짧은 투덜거림이, 묘하게 내 등을 찌르는 것 같았다.

웃으며 넘길 수 있었던 말들이 이제는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앞서 걷던 가이드는 묵묵히 산길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 얼굴엔 이런 기색이 읽혔다.

‘또 한국인들이군… 무모하게 시작했다가, 결국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이미 이 길은, 끝까지 가야만 한다.


해발 2,900m, 작은 산장이 눈앞에 보이자, 영도의 어깨가 푹 꺼졌다.

비에 젖고 진흙에 파묻힌 채, 그는 거의 쓰러지듯 산장 의자에 앉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자꾸 머리가 아프다며 어지럽다고 중얼거렸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게 심각한 고산병 증상이었다는 것을.

잠시 숨을 고르던 영도가 나를 노려봤다.


“형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어. 형 아니었으면 난 케이블카 탔어.”

반쯤 농담 같았지만, 목소리에는 진짜 분노가 묻어 있었다.

나도 이미 체력이 바닥나 참을성이 줄어든 상태였다.

“애초에 케이블카는 고장이라 운행 안 했어. 그럼 지금 혼자 그냥 내려가든가!”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몇 초간의 침묵 후, 영도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경기장에 오른 파이터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 형이라고 봐줬더만 안 되겠네.”

순식간에 날아온 분노의 펀치.

나는 당황해 몸을 젖히며 피했지만, 이어지는 공격에 진짜 싸움이 벌어졌다.

영도는 체대 출신답게 타격에 능했다. 주먹이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내 몸은 러닝과 주짓수 훈련으로 단련돼 있었다.


고산병+체력 고갈+흥분 상태의 영도는 타점이 느려졌고, 날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순간 그의 팔을 잡아끌고, 몸을 틀어 트라이앵글 초크 기술을 걸었다.

영도는 제압되었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날 들어 슬램을 시도하려 했다.난 겨우겨우 옆에 기둥을 잡고 버티며 슬램 당하지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야, 진정해! 사람 죽일려고 하는 거야?”

둘 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진흙과 땀으로 뒤엉킨 채 한동안 그대로 버텼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만 산장 안에 울려 퍼졌다.


가이드가 놀라 달려오자, 영도의 눈이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우리 둘 다 산장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그러다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여행 와서, 그것도 판시판 산장에서 UFC를 찍다니.

우린 서로를 부축하며 바닥에 앉았다.

영도가 헐떡이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형, 미안한데… 지금도 형 죽이고 싶은데, 다행히 제 펀치력은 원고용으로만 최적화돼 있어서 이번 한 번만 봐드립니다. 일단 무사히 정상 찍으러 가시죠?”

분노는 어느새 씻겨 내려갔고, 묘한 동지애 같은 게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리는 “아루!! 아루!!”를 외치며 끝까지 힘을 내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 모두에게 같은 외침을 전파했다. 잠시 쉬자 영도의 고산병 증상도 조금 나아졌고, 천천히 남은 거리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상석 표지판이 보였고, 나는 “다 왔다!!” 외치며 페이스를 올려 뛰어갔다. 그런데… 정사석 표지판부터 또 한참을 올라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 틈에서 하얗게 질린 영도가 한마디 던졌다.

“형, 이거 완전 ‘정상 징벌 게임’이네요. 내가 여행을 하는건지 징벌을 받고있는건지? 하..”


무사히 정상에 도착하자, 지나쳐가던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아루!!”를 외쳤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영도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고산병은 빨리 내려가야 풀리기에,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밤이 오기 전에 내려가지 않으면 시야 확보가 어려워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전, 내려가면서 셀카를 찍었다. 사진 속 영도의 얼굴에는 힘듦과 원망,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몇 년 후 한국에서 그는 솔직히 말했다.

“형, 사실 그때 절벽에서 밀어버릴까 고민했어요.”

“야, 그럼 나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쩌라고?”

“걱정 마세요. 유서는 형 욕으로 가득 채워서 남겼을 겁니다.”

그의 입담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웃게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는 즐겁게 만나고 있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밤, 우리는 하산을 마쳤다. 영도는 여전히 유머를 잃지 않고 “김미어워터!!”를 외치며 영어 개그를 섞었고, 나도 물을 한껏 들이마시며 피로를 씻었다. 가이드는 “슈퍼코리안 맞다!”며 박수를 치고 따봉을 외쳤다.


숙소에 도착해 간단히 맥주를 한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혹시 모를 영도의 암살 계획(?)에 긴장하며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영도는 “하… 형,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만 하고 가네. 담당자 하노이 도착했다고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라며 하노이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사파 여행을 이어갔다. 사파 여행 마지막 날, 다음 목적지인 라오스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졌고, 날 태울 벤은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사기당한 건가?” 싶던 찰나, 벤이 도착했고, 차 안에는 여러 인종의 배낭여행자들이 몸을 구겨 앉아 있었다.


사파를 출발해 베트남 마지막 국경 도시를 지나 라오스로 향했다. 늘 그렇듯, 이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라오스까지의 여정이 무려 28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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